로컬 문화예술 뉴스레터 <Beyond L> 연재
나의 고향 제주에서 해녀들을 교육할 때 가장 강조하는 말이 있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라고. 평온해 보이지만 위험천만한 바닷속에서 당신의 숨만큼만 버티라고.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땐 시작했던 물 위로 올라와, 숨을 고르라고.
✧ 드라마 <웰컴 투 삼달리> 1화 조삼달의 말 중에서
이 더위에도 찐빵을 팔다니…… 커다란 찜통 위로 새어 나오는 훈기가 마침 나를 에워쌌다. 잠깐 불쾌했지만 거리는 찜통 열기만큼이나 무더웠다. 도심 속 기온은 손쉽게 나의 미간을 구겼다. 가로수 아래서 그늘 한 점을 찾아 서 있는데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입추가 지났는데도 가을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여름은.
매미가 울기 시작하니 그해 여름이 떠오른다. 땡볕이 그저 싫어 겨울의 모든 것을 좋아라 하는 내게도 한철 좋은 여름이 있었다. 졸업작품으로 제출할 시 10편을 모아두었고 두어 달만 지나면 졸업이었는데 갑작스런 불안 증세가 극심해져 평소처럼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중도휴학을 선택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기로 결정해야 했다. 수척한 얼굴을 하고 착륙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돌아와 버렸는데 다시 육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상공 위에서 바라보는 나의 고향 제주가 육지보다 훨씬 커 보였다.
섬으로 내려간 뒤, 긴 소매의 옷들을 꺼내 입기 시작했음에도 신이 나질 않았다. 나의 외출은 내원이 전부였다. 글을 쓰는 건 고사하고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읽는 게 어려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지?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내게 남은 날이 너무 길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이 말은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삶이 두려워 밖으로 나오지 않던 미지(박보영 분)가 할머니 월순(차미경 분)에게 했던 말이기도 하다. 방문을 부숴버리고 끌어내려했던 엄마 옥희(차영남 분)를 대신해 월순은 미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월순: 아이고, 우리 번데기 얼마나 큰 나비가 되려고 이러나?
미지: (이불 뒤집어쓴 채로) 아니, 나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월순: 그럼 또 어때? 지금처럼 아픈 데 없이 밥 잘 먹고 가끔 할머니 말동무 해 주면서 살면 되지. 할머니가 너 하나 먹여 살릴 돈 있어. 진짜.
미지: (이불 내리며) 할머니, 나 진짜 정신병인가 봐. 다 너무 후회되고 걱정 돼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월순: 뭐가 그렇게 후회고 걱정이야?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아직 멀었는데.
미지: (울먹거리며) 모르겠어. 나도 진짜 나가야 되는 거 아는데…… 다시 아무것도 아닌 때로 못 돌아가겠어. 거기 밖에 돌아갈 데가 없는 것도 아는데…… 너무 초라하고 지겨워. 나한테 남은 날이 너무 길어서 (여전히 울먹거리며) 아, 아무것도 못하겠어. 할머니… 나 너무 쓰레기 같아.
월순: 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 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냥 빠져도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미지: (울면서) 할머니…… (월순을 끌어안으며 울음을 주체할 수 없다)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무렵, 혼자서 버스를 탔다. 1시간 넘게 달려가 도착한 곳은 애월에 위치한 누군가의 집이었고, 그곳에서 독서모임이 열렸다.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함께 읽기로 한 책에 대해 얘기하다가 돌아오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예전 같았으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책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그 집에 사는 고양이를 보기 위해서라도, 애월로 향했다. 책은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살려고 간 것이었다. 살아보려고.
새로이 사람들을 만나느라 제시간에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걸 자꾸 까먹었다. 병원에 가는 것도 그만하기로 했다(의사의 처방 없이 내원을 중지하는 건 위험합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의사 말고, 하늘이 맑으면 지는 해를 보러 가자고 얘기해 주는 친구가 필요했다. 다 같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오름을 오르기도 하고, 몸을 덜덜 떨며 계곡에서 놀기도 하고, 친구의 생일날 튜브에 몸을 싣고 하늘만 바라보기도 하고……
"네 생일 되게 좋다."
"왜?"
"이렇게 바다에 둥둥 떠가지고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도 네 생일날 해."
"나 겨울에 태어났는데?"
"풉… 알고 말한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아무거나 하는 시간을 보내기. 나 스스로를 낯선 것에게 내맡기던, 무엇이든 최고라 말할 수 있었던 계절을, 그해 여름을 어딘가에 아로새기고 싶었다. 나를 바깥으로 꺼내준 이들 대부분은 한 번쯤 제주에서 살아보고자 내려온 사람들이었는데,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돌아갈 날을 정하지 않고 지냈다. 이들의 결심이 궁금했다. 그들은 초연했고 유연하고 맑은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서로가 솔직해진 자리에서 나의 불안을 꺼내보였을 때에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 말해주었다. 누군가는 내가 자신에게 제주에 왜 왔느냐고 질문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 내가 공식적으로 질문하면 답해줄 거야?”
“공식적으로? 어떻게?”
“너를 인터뷰하는 거지. 네가 제주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서.”
(다음 편에 계속)
▸ 글에서 언급한 씬은 극 중 이렇게 표현됩니다. 드라마 <미지의 서울>은 일란성쌍둥이 자매 '미래'와 '미지'가 인생을 바꿔 살며 서로를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방영 이후 극본집이 출간되었으나 글에서 작성한 대본은 제 방식이며 원작과는 상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