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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ㄱㅕㅇㅇㅣ Apr 23. 2020

말 많고 재치있는 사람의 다독다독

오은, 『다독임』(난다, 2020)

2015년 문래동에 위치한 공간 '재미공작소'에서 오은 시인을 처음 만났다. 2주 동안 진행된 강독회였고, 신청한 사람들과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 오은의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눴다. 당시 블로그에 써둔 일기를 꺼내 복기하자면 오은 시인에 대해 나는 이렇게 썼다.


"말 많고 재치있는 사람."


그로부터 5년이 지났고, 그동안 시집 세 권을 더 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여러 일을 도모해왔다. 그중 예스24의 팟캐스트 <책읽아웃-오은의 옹기종기>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그는 평소 자신의 SNS에서 읽고 있는 책의 일부를 발췌하며 올리는 다독多讀가다. 그런 사람이 한 번 더 다독가임을 공표하고, 저자들과 열심히 책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터, 그래, 오은 믿고, 더블로 가! 그렇다면 오은이란 사람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시대의 다독다독가.



ⓒ 난다



다독다독가.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이 책의 제목 덕분이다. 다독임, 그는 안다. 다독임이 정확히 무엇이고, 이 책의 제목이 왜 '다독임'이어야 하는지.


보듬다, 감싸다, 쓰다듬다, 다독이다, 어루만지다 같은 동사에 마음을 내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직접 할 때 역설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도 했다. 다독이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돌아보는 일이 잦았다. (7)


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을 거꾸로 읽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책을 손에 쥐면 맨뒷장, 그러니까 책정보부터 찾아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 역시 그리하려 했다. 그런데 불쑥 한 페이지로 잘못 펼쳐졌고, 이는 책을 거꾸로 읽게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 "봄이었다. (3월 19일)"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리고 제대로 확인한 책정보에는 "초판 1쇄 인쇄 2020년 3월 20일"이라 적혀 있었다. 그날따라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거쳐온 사람들의 이름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인쇄 직전까지 글쓰기에 전념한 한 사람과 그 글을 받아 마지막을 장식해준 사람들의 노고를 외면할 수 없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를 계기로 마지막 책정보 페이지에서부터 거꾸로 읽어 나갔다. 3월 20일, 3월 19일, 2월 19일, 1월 23일, ... 그렇게 2014년 10월 1일까지.


책의 맨앞 표지를 덮고 보니 역시였다. 역시, 오은. 그는 무언가를 깨닫고 무릎을 탁 칠 줄 알고,주변을 돌아보고 들여다보며 관찰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주변 사람들을 차례로 떠나보냈던, 최근 2년 동안의 시간을 잘 건너온 사람이기도 했다. 책을 거꾸로 읽어도 오은이란 사람은 내가 독자로서 어렴풋이 알고 있던 대로였다.




그는 쓰는 사람이다.


쓰는 일은 나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단어를 많이 쓰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나를 쓰게 만드는 동력은 어디에서 오는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3)


그는 말하는 사람이자 듣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달랐다. 이 기분은 채우고 났을 때의 개운함에 훨씬 더 가까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을 때의 개운함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천천히 듣고 그것을 차분하게 새기고 난 후에 찾아오는 개운함이었다. (192)


그는 전처럼 질문하지 않는 자신을 두려워하면서 무엇이든 물어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묻는 것이 두려워질수록 삶은 생기를 잃는다. 질문이 없는 삶은, 질문이 없다는 점에서 답이 나오지 않는 삶이기도 하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스스로의 내일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107)


그는 낯섦을 낯설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바로 그 낯섦 때문에, 나는 여태껏 여행을 멀리해왔었다. 남들이 여행의 묘미로 파악하는 그것이 내게는 '예기치 않은, 당혹스러운 상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73)


'오길 정말 잘했잖아. 혼자 여행하는 것, 정말 아무것도 아니잖아!'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기 위해 무수한 아무것을 거쳐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병원에서 종달리 초등학교까지 이어지던 일흔네 개의 정류장처럼. (259)


그는 곁에 두는 사람들을 위해 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곁에 다가간다는 것은 나의 틈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시간의 틈을 벌려 여유를 만들고 공간의 틈을 벌려 그 사람을 나의 영역으로 끌어 당겨야 한다. (203)


그동안 그의 곁을 떠난 사람들, 아버지를 비롯해 황현산 선생님, 허수경 누나. 그들의 빈자리를 느끼며 슬퍼하는 것보다 그 빈자리가 익숙해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 책의 페이지를 거꾸로 돌이켜 읽을수록 그가 떠난 자들을 위해 애쓰고 만든 틈이 유난히 잘 보였다. 어느 날은 김민정 시인으로부터 전해들은 허수경 누나의 말을 빌어 아버지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다가, 어느 날은 고향에 가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서 서로의 등을 내민다. 또 어느 날은 병상에 계신 황현산 선생님을 뵙고 돌아와 그의 책을 읽는다거나, 허수경 누나의 1주기를 추모하는 편지를 쓰기도 한다. 빈틈은 사람에게서 공간에게로 내어주기도 했다. 신촌에 위치했던 시집 서점 '위트앤시니컬'의 새로운 출발을 환대한다.


내가 알던 그 오은, 그러나 함부로 안다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는 내가 아는 시인들 중 한 사람이니까. 그의 말마따나 "어떤 사람은 '사람'이었다가 마침내 '한 사람'이 되"기도 하니까. 그렇게 어떤 책은 한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여전히 그가 "말 많고 재치있는 사람"이길 바라면서 가끔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 불쑥 지면에 나타나주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본다. 기꺼이 반가워하겠다. 그는 다독임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람이 아니던가.


다독다독은 의태어지만 다독이거나 다독임을 당할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뭉근하고 다정한 위로가 들릴 때도 있고 "괜찮아? 괜찮은 거지?"라는 다급한 물음이 들릴 때도 있다. 어느 것이든 괜찮은 사람이 괜찮지 않은 존재에게 건네는 말이다. 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존재도 그 순간 만큼은 괜찮아지게 만드는 말이다. 마침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이다.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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