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보영,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쌤앤파커스, 2019)
이 책은 시인 문보영의 행보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그렇다면 시인의 행보란 무엇일까? 그는 시인인데, 브이로그를 한다.
브이로그? 그가 시작할 때만 해도 문학 관련 채널이 거의 없었다(지금도 문인이 나서서 하는 건 드물다. 김승일이 얼른 노벨문학상 수상기로 시작했으면 좋으련만). 그가 어디에 갔고, 무엇을 먹었고(대체로 '피자'),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읽었고, 택배로는 어떤 책이 도착했고, 말씹러(돼지인형)와는 어떤 대화를 나눴으며, 여전히 자전거를 탔는지 등을 알 수 있다. 사실 여기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몇 분짜리로 짜깁기한 그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왜? 구독 버튼 누르고 한창 잘 챙겨 보고 있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를 초창기 때부터 구독하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가 왜 브이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에 실린 몇 편의 글을 연속적으로 읽고 있으면 알 수 있다.
제발트를 읽으며, 그리고 누군가의 브이로그를 보며 다시 걷는 방법을 터득했다. 사람이 사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이상한 힘이 되었다. 마치 나도 누군가의 삶을 같이 사는 기분이 들었다. 남의 교통카드를 쓰니 대중교통을 함께 이용하는 것 같고, 삶을 함께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처럼. 삶을 같이 견디기. 남이 같이 살아주면 삶이 반으로 줄어드니까 반만 살아도 된달까. 정신과 약 때문에 허기라는 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브이로그를 찍으면서 허기를 조금 되찾았다. 나는 허기를 연습한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브이로그를 시작한 건지도 모른다. (133)
사실 나도 내원과 입원을 선택할 정도로 우울증을 앓았었고, 문보영 시인이 브이로그를 하며 "허기"를 되찾고, 산책을 하고, "연습을 통해" 애정이 생겨나기도 한다고 말할 때, '난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무얼 했지?'하며 지난 날을 몇 차례 복구해보았는데, 아마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새로운 사람.
그 해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은 두 손이 모자랄 정도였고 그 중에 지금 내 곁에 남은 사람은 한 손도 채 안 되지만(내 사전에 '곁에 남은 사람'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 카톡을 해서 "넌 왜 맨날 같은 티 입어? 큐티 프리티 뷰티"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해하지 않고 얘가 또 많이 지루한 모양이구나 할 자란 뜻이다), 사람들이 나로부터 오고가는 과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 누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도 그 사람이 필요해서,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별이 감당이 안 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솜사탕을 받은 너구리가 나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강가에서 너구리가 놀고 있는데 누가 너구리에게 분홍색 솜사탕을 주었다. 너구리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게 얼마나 맛있는 건지도. 그냥 받자마자 강물에 빠뜨렸다. 막대 같은 손으로 강물을 휘휘 저으며 '어디 갔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솜사탕은 정말 어디로 가버렸다. 영영 어리둥절히 살게 된 너구리. 사랑이 생기자마자 그게 사라져서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멍텅구리 너구리. (97)
손을 잡지 않고 손목을 잡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것들이 직전처럼 느껴져서 행복하다. 직전으로만 이루어진 직전들의 세계. 우리는 사랑하기 직전, 헤어지기 직전, 망하기 직전, 행복하기 직전, 아프기 직전, 슬프기 직전입니다. (81)
언제부터인가 애인들에게 쓰고 버릴 수 있는 선물을 받고 싶어졌다. 닳지 않는 물건은 두렵다. 썩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선물은 위험하다. (163)
문보영 시인을 만나면 하이파이브라도 해야할 심정이다. 다 읽고 나니 한 사람에게 나라는 인간을 다 들킨 기분이었다. 차라리 너구리가 되고 싶었달까? 달콤한 솜사탕을 강가에 내려놓고 손을 슥슥 씻는 너구리, 아니 인간.
손이라도 한 번 스치고 싶은 사람.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하고 묻기도 전에 쓰고 마는 사람. 이별이나 이혼 같은 걸 해본 적도 없으면서 작별인사는 기가 막히게 잘할 것 같은 사람. 헤어지기 전에 썩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물건을 잔뜩 선물해버릴 사람. 연애보다 결혼을 하고 싶은 사람. 잘못 처방된 약에 효과를 보는 운 같은 건 없는 사람…… 기타 등등 시인과 나는 피자 한 조각 만큼은 닮아 있었다.
우울 같은 우물에 빠져 있을 무렵 일기장을 십몇 권이나 써버렸다는 어느 시인은 이제 밖으로 나와 자전거 쳇바퀴도 굴리고, 좋아하는 피자 한 판쯤 거뜬히 먹는다. 그러는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이 봐준다. 응원도 해준다. 일기를 훔쳐보고 싶다고 돈도 보내준다. 그러면 시인은 우편이든 전자우편이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일기를 보낸다(이건 반대의 상황, 정확히는 문보영이 먼저 자신의 일기를 배달해주겠다 했고 사람들은 돈을 주고 그것을 샀다).
한 사람이 '살아남기'까지 그 시간을 어떤 식으로 견뎠는지 알고 싶다면, 우울증 수기 같은 거 시중에 많이들 판매되고 있지만은 문보영 만큼 재밌게 쓰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고 감히 말해본다. 그러면 '아, 나도 이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을 테다.
그런데 정말 살 수 있을까?
잘 살 수 있을까?
'잘'은 언제나 욕심일까?
오늘의 저녁만 있어도 좋다는 생각을 조금 덜어내고, 좋아하는 피자 한 판을 시켜 왜 안 오나 기다려도 보기. 매일을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안 될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기. 살아진다. 시인의 고향 말을 빌려와 말해본다. 살당보민 살아진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지 증오하는지 분간이 잘 안 서는데 문학 없이 살 수 없는 건 맞는 것 같다고, 상처 난 부위에 거즈를 붙일 때 거즈를 사랑하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는 기호랄 것이 없지 않느냐고, 하지만 피를 멈추려면 거즈를 대야 하는 것이 맞다고, 어쨌건 거즈는 다소간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했다. (21-22)
어느 해 어느 누구의 수상소감이 좋아서 이곳 저곳(이라 해봤자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호외 뿌리듯 올렸었는데, 그것이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문보영 시인의 수상소감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문보영이 계속해서 산문만치 긴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고, 출판사나 작가 모두 괜찮으면 시 한 편으로 된 시집을 낸다거나, 아니면 『준최선의 롱런』과 이 책의 발행일 간격 만큼이나 책을 자주 내주었으면 좋겠다.
아아, 입버릇처럼 말하건대, 나는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나희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