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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원짜리 MCM가방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by wonderfulharu

IMF. 모든 것이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뉴스에서는 매일같이 구조조정과 부도 소식이 쏟아졌고, 동네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우리 집만은 괜찮을 거라 믿었다. 대기업 부장으로 일하는 아빠와 알뜰한 엄마, 32평 아파트에서 지내던 우리 가족의 삶은, 그때까지는 단단해 보였다. 아빠의 보너스로 많은 것이 유지되었고, 조만간 건물주가 될 거라는 꿈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적 위기를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IMF라는 거센 태풍은 우리 가족도 무너뜨렸다. 아빠는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나왔다. 준비해 둔 부동산 대신 남은 것은 어마어마한 빚이었다. 삶의 기반이 한순간에 흔들려버렸다.


나는 그 시절, 일반고 이과 고3이었다. 공부밖에 할 줄 몰랐다. 상업고등학교였다면 취업이라도 노려볼 수 있었겠지만, 나는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해왔던 터라,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빠가 퇴직하고, 엄마가 가계부 앞에서 깊은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면서도, 차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대학에 보내달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학자금 대출 같은 것도, 당시의 우리 형편에는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무력해졌다. 결국 대학에는 합격했지만, 입학할 수 없었다.


모든 계획이, 기대가 무너졌다. 캄캄하고, 허무했다. 무엇으로도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던 시간. 나는 너무 작고 하찮게 느껴졌다.


그 무렵, 나에게는 S라는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늘 함께했던 단짝. 나는 15층, 친구는 13층에 살았다. 자매처럼 가깝던 친구였지만, 집안 사정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입 밖에 내는 순간, 현실이 더 날카로워질 것 같았다.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던 나에게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야, 주양쇼핑에서 MCM 가방을 3만 원에 판대! 완전 세일이래! 빨리 가자!"


친구의 들뜬 목소리. 명품 가방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안돼. 나 못 가. 관심도 없어."


사실은 돈이 없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친구는 다시 말했다.


"이 가격은 진짜 거저야. 이거 안 사면 바보라니까!"


그 순간, 마음속 벽이 무너졌다.


"내가 관심 없다는데 왜 자꾸 그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친구는 잠시 조용했다가, 다시 힘없이 말했다.


"그럼 내가 예쁜 걸로 사 올게. 나중에 돈 줘."


그 말을 들은 순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나 돈 없어… 하나도 없어. 돈 없다는 말 하기 싫어서 참고 있었는데, 너는 눈치도 없이…"


말이 끝나자, 수화기 너머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친구는 짧게, "아… 알았어."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돈이 가진 무게를 실감했다. 돈은 생활비 이상의 것이었다. 자존심이었고, 관계였고, 꿈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돈'이라는 단어 앞에서 작아졌다. 돈이 무서웠고, 억울했다. 떨쳐낼 수 없는 감정이었다.


친구들은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그저 부러워했다. 그 뒤로도 돈이 없는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대학은 포기해야 했고, 취업도 쉽지 않았다. 세상은 냉정했고, 일반고 졸업생이라는 이력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늘 조급했고, 불안했고, 아무리 노력해도 어딘가 모자란 기분에 시달렸다. 3만 원짜리 MCM 가방. 그날 그 전화 한 통이 내 인생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 순간부터 무언가 달라졌다.


돈은 내 삶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모르는 사이, 세상의 가치를 돈으로 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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