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아이라인을 그리고 마스카라를 하고 하얀 분칠에 입술을 선명하게 오렌지빛 립스틱을 발랐다. 10년 전 결혼식을 할 때 산 비싼 정장을 입고 회색 스타킹을 신고 무난한 검은색 힐을 신었다. 왠지 그런 복장이 시골 풍경에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3주간의 숙제를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일쯤은 감수할 수 있었다.
“나 예뻐?”
“이상해.”
“딴 사람 같아.”
여자는 세 남자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화장한 자신이 그리고 영상에서 길쭉하게 나오는 스스로가 이미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일부러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이상해. 하지 마.”
남자는 정장을 차려 입고 춤을 추는 여자를 보고 대학원 시절 그녀가 화장을 진하게 하고 무대에서 춤을 췄던 것을 떠올랐다. 늘씬하게 빠진 그녀, 선이 곱지는 않았지만 빠지지 않아 멀리서도 그의 눈에만 들어왔던 그녀. 그녀가 살아난 듯 춤을 추어서 남자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남자는 낯선 여자에게 말을 걸듯이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얀이랑 컨설팅 좀 하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같이 일한다고?”
남자의 핼쑥하고 퀭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는 집에서 입는 감색 반바지 추리링에 빛바래고 목이 늘어진 녹색 티셔츠를 입었다. 햇빛에 반사된 밝은 갈색 긴 머리는 바람에 붕 떠올랐다. 여자는 그런 남자라도 상관없었다. 숙제를 끝낼 수 있는 기대감과 이틀 안에 주어질 자기만의 시간에 들떠 있었다.
남자의 머릿속은 여전히 일로 가득 찼다. 집에 와서도 업무 걱정으로 잘 쉬지도 못하는 예민하고 책임감이 강한 남편을 여자는 종종 잊었다. 그녀가 그것까지 민감하게 감지하고 보살폈다면 그들 관계는 악화되었으리라. 무던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 그래서 그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여자는 부부 생활 10년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내가 코칭 좀 받으려고.”
“그 사람 당신보다 더 잘 아는 거야?”
여자는 호기심으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좋은 기분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돌발적인 질문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렇게 솔직하고 직접적인 발언은 남자를 자극하기에 좋았다.
“아니 그냥 내가 직면한 문제를 상의할 사람이 필요해. 당신한테 말하면 당신 관심 없잖아. 지루해할 게 분명하고.”
남자의 말에 여자는 기분이 상했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그리고 그날 남자가 여자의 과제를 도와줬고 그런 남자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것처럼 관용적이었고, 남자의 말에 귀 기울고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저항이나 비판을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세세한 전문분야도 공통적인 센스로 통할 수도 있잖아.”
“내가 말해도 너는 별로 안 궁금해할걸.”
여자는 과거에 남자의 말에 무관심했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결정 후 토론은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흥미가 없었지만, 여자는 그것이 남자의 관심과 구조 요청임을 직감했다.
“일 년 정도 육아 휴직을 한 동료 대신 생산 매니저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보스한테 너무 힘들어서 안되겠다고 말하면 안 될까?”
“그러다 당신 죽어. 그만둔다고 내일 당장 말해”
여자는 한번 지치고 힘든 남자에게 냉혹하게 내뱉었다.
여자는 남자 입장을 몰라서 한 말이 아니다. 남자의 업무 피로를 이해하고, 해결할 현실적인 방법이 그것이었다. 두통과 만성 피로로 인한 창백한 얼굴, 처진 피부는 누가 봐도 그를 병자로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5일 근무에 지쳐서 주말은 아무것도 안 하고 꼬박 쉬어야 일요일에 힘을 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어려웠다.
“약속 한 걸 안 지키면 내 신용이 어떻게 되니?”
정 안 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루거나 약속을 엎을 수도 있지만 그는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며 충성하다. 남자는 자기 안위보다 자기신용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더 중요한 가치임을 알기에 절대 되물 릴 수 없었다.
성실함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신용은 여자의 신념과도 같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를 욕하지 않는다.
“인턴을 더 고용하든지, 그의 일을 분담할 동료를 구해야지 않아.”
“인원 고용할 예산이 부족하고, 당장은 자신밖에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어.”
“퇴근 전, 인사부에서 넘긴 자료를 처리 안 해주면 그것 때문 하루에 몇 억 원의 손실이 나는데 그걸 안 할 수 있니? 그래서 이것 처리 저것 처리하다 보면 늦어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래, 이제야 코칭을 제대로 하네.”
남자는 결론만 내리지 않고, 강압하지 않고 질문을 하는 여자의 올바른 접근 태도에 쾌재를 불렀지만 그것이 여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코칭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코칭에 대한 개념도 잡히지 않은 내게 그 코칭이 다 무슨 상관이야. 어떻게든 해봐."
"그게 뭐 어쨌든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봐야지.”
“내가 다른 부서 동료한테 평가서를 달라고 요청하고 일주일이 지나도 안 줘. 다시 연락해도 안 주다가 겨우 받으면 기대치 이하의 자료를 내밀어.”
“K 알지. 그녀가 그러는데… … 독일인이 전화 통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 사소한 문제에도 동료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대. 거기서 중요한 건 우리 생각에 일처리가 확실하고 그렇게 공사 구분이 확실한 그들이, 통화에서 날씨부터 말하고, 건강 상태 묻는 등의 사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거야. 당신 동료들과 관계 어때?”
“내가 보기엔 동료들과 관계가 좋아. 80 대 20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
“또 B 씨가 등산을 함께 가는 파독 간호사 할머니들이 있대. 식당에 가면 점원이랑 이야기하고 어디서나 말을 잘 붙이고 친절한 할머니들인데, 그날은 기관사랑 이야기하면서, 우리 맨날 여기 오는데, 오늘은 어떤 루트로 등산 갈 거야. 그런데 우리 막내가 오늘 늦어지네. 몇 분 늦는다는데 혹시 좀 기다려 줄 수 있어?라고 물었는데, 아 글쎄 그 기관사가 ‘많이는 안 되고 일 이분 정도는 늦춰 줄 수 있지.’라고 대답해서 그날 운 좋게 함께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었대.”
“중국인들만 펑요우나 관씨를 찾는 게 아니라 독일인도 그래. 한번 친밀한 관계를 맺잖아. 그럼 그 관계를 끊기 어려운 게 인지상정이야. 내가 어떻게 아니카와 친구가 됐는 줄 알아? 집에 초대해서 밥을 먹였잖아. 함께 먹고 시간을 보내면 가까워질 수밖에 없어. 사람은 단순하고 다 똑같아. 잘 해 주고, 입에 뭔가를 먹여주는 사람, 한마디도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게 되어 있어.”
“그 동료한테 초콜릿을 줘.”
“그 동료는 내가 가면 무슨 일로 왔는지 다 안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는 내 눈을 피하는 게 뻔히 보이고 일도 많아. 거기다 초콜릿을 건네라고? 그게 말이 돼?”
“농담하는 거 아니야. 우리 인간은 다 똑같아. 내 말 못 믿겠으면 한 번 해 봐. 기업도,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규율과 법칙을 깨어 버리지.”
아이들이 집에 가자고 보챘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꼈다.
“해결책보다 이렇게 어디다 말할 곳이 필요했나 봐.”
“아니, 생각해 봐. 진짜 초콜릿을 주면 그 동료가 어떤 태도가 나올지 궁금해.”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말에 여운이 남았다. 남자는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다는 것. 해결책보다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게 더 좋아한다는 걸 간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