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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Mar 07. 2024

남과 여

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기대앉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고 프링글스를 달라고 했다. 그는 딴 일에 빠져 있었다. 3D 프린트로 프린트한 퍼즐 조각을 이리저리 맞추는 중이었다. 반응이 느린 걸 보고 아이가 대신 엄마에게 과자를 줬다. 여자는 3개를 꺼내면서, “짜, 엄마는 더 이상 안 먹을 거야.”라고 선언했다. 3분 후, 현실로 돌아온 남자는 여자에게 프링글스를 건넸다. 여자는 투정을 섞은 어투로 “안 먹어요.”라고 말했다. 

남자는 작은 어감 변화를 알지 못했다. 여자는 남자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게 불편하다. “아니, 괜찮아. 고마워.라고 하면 기분이 안 나쁠 거야.”라고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의 억양을 앵무새처럼 흉내 내면서 비꼬았다. 여자는 자신의 어투가 화나거나 짜증 난 것과는 다르다는 걸 어필하고 싶다. 다르게 들은 사람의 증명이 필요했다.  

“엄마 말투가 화난 것처럼 들렸어?” 

아이는 여자의 억양에 짜증스럽지 않았다고 엄마를 변호했다. 남자는 여자의 억양이 짜증이 섞인 것 같다고 했다. 도저히 적응이 안된다고 중얼거렀다. 남자가 다음에 하는 말들은 여자를 비난하는 말이므로 여자는 귀를 닫았다. 그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서, “헤이, 나의 보물, 나는 충분히 먹었어요. 고마워. 마이 러브, 이건 어때요. 이런 게 좋아요?”라고 재치 있게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그를 달랬다. “어, 그래. 이제 좀 낫네.”라고 했다. 

남자는 재주가 많다. 좋은 직장이 있는 남자는 얼마 전에 장만한 아파트로 에어 비앤비를 해보고, 또 비즈니스 관련 책을 썼다. 여가 시간을 이용해 자신만의 플레잉 카드를 만들었고, 이번에는 3D 프린트로 퍼즐을 설계해 물건을 넣을 수 있는 박스를 발명했다. 그와 동시에 유튜브 영상을 제작하고 팟캐스트까지 시도했다. 여자는 남자가 요란하지 않으면서 자기 시간을 생산적으로 쓰는 것이 기특했다. 그러나, 매번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이번에 여자는 남자가 처음 시도하는 팟캐스트가 궁금해서 한번 들려달라고 했다.  

“당신은 이런 거 안 궁금하잖아.”라고 남자가 잘라 말했다. 

“궁금하지 않았다면 보여달라고 할까?” 여자가 되물었다. 

남자는 여자의 호기심이 반가운 듯 핸드폰을 열고 팟캐스트를 재생했다. 남자는 팟캐스트 속에서 여자가 가끔씩 익숙하지 않은 일본어를 말해야 할 때처럼 구차하게 변명을 했다. 말이 느리고,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연습을 하는 중이며, 지금 이것이 잘 만든 팟캐스트는 아니지만 한번 해 보겠다는 쓸데없는 변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문 분야에 대한 발언에서 그의 목소리는 힘이 붙었고 스피치 속도가 빨라졌다. 

여자가 팟캐스트를 다 듣기 전에, 남자는 “이거 정말 별로야.”라고 끊었다. 

“왜 별로라고 하는 거야?”여자가 물었다. 

“아니, 왜 별로이긴, 별로이니깐 별로지. 나도 그런 거 알고 있어. 내가 뭐 잘못한 것처럼 따져 묻네.”

여자는 ‘왜’라는 물음이 남의 호감보다 반감을 얻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중에 튀어나왔고 아차 했다. 호기심이 생기면 충족하고 싶은 마음에 목소리가 커지고 빨라졌다. 먼저 자신감 없는 남자의 심리와 속 마음을 알고 싶어서 물었던 것이다. 남자의 거센 반응에 궁금증이 저변으로 추락했다. 한숨이 나왔다. 어제 잘 마무리된 대화의 끝을 남자는 아직 잡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 어느 기억의 여자의 거센 어조와 불 퉁명한 표정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때와 비슷한 목소리나 태도를 보면 언제든지 그걸 꺼내 반격할 준비를 갖추는 차렷 준비 자세였다.  

“나는 다른 생각이야. 당신의 팟캐스트의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라고 여자는 톤을 늦추고 화를 누르며 말했다. 

여자는 아무리 허접해도 계속할 이유는 있고, 남자의 팟캐스트 콘텐츠가 좋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말을 빨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성량과 속도, 어휘를 고르는 것 또한 스피치의 기술이며, 내용에 따라 엄선해서 고르고 완곡을 조절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워크숍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뿌듯해서 말했던 남자의 모습이 어디 갔을까. 그걸 상기해 주고 싶었다. 남자는 이미 자기만의 말 하기 스타일을 갖추고 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 장점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좋다고. 

“그런데, 왜 당신은 화를 내는 거야?” 

여자는 그의 거친 말투에 자신의 말투가 숨어 있다는 걸 알았다. 남자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 내고 너도 당해봐라는 복수극을 시작 중이었다. 끝나지 않은 어제의 싸움, 자신이 승복하고 미안하다고 먼저 말했던 이전의 모든 말다툼의 기억, 그리고 자신이 주로 사과하는 억울함과 여자의 무반응에 대한 괘씸함까지 더한 복수극. 

여자는 남자의 반응이 억센 고사리 줄기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삶아도 한번 잘못 삶은 고사리는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깨를 넣어도 질긴 식감을 바꾸기 어려워 고사리 무침을 아예 망쳐버린 것처럼, 되돌리가 어려웠다. 여자는 그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대화를 시작했었다. 그런 자기 의도가 묵살된 것 같아, 억울한 심정이었다. 이번에는 고사리 무침을 음식물 쓰레기 통에 처넣어 싶었다. 

“물론 나쁜 점이 많지. 블라블라..”

여자는 남자의 말을 껐다. 들어 봤자, 싸움만 커질 것이다. 이전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짜증을 내면, 그의 트리거에서 일어난 이전의 감정에 여자의 트리거까지 일어나서 대전쟁이 일어날 것이었다. 여자는 톤은 낮춰 조용히 말했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어. 그걸 말하려고 하는데 내게 말할 기회를 줘.”

 남자는 다시 시작했다. 블라블라 …

여자는 남자가 지금 상황과 달리, 여자의 억양과, 평소 여자 무관심했던 태도를 떠올리며 자신을 몰아붙이는 거라고 확신했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말을 반복했다. 

“분명히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 그걸 제대로 보자는 게 내 뜻이고.” 

“그래 이제야 알겠네. 그래 그건 고마워.” 

여자는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부엌에 가서 커피를 들고 와 자리에 가서 남자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당신은 내가 한 비난을 견딜 수 없는 거겠지.”라고 말했다. 

“생각을 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좀 돌아앉았어. 멀찍이 앉아서 우리가 한 대화를 곱씹어 보게.” 여자의 억울함이 다시 두더지 두드리기 장난감의 두더지 머리처럼 튀어나왔다. 여자는 다시 화를 삭이며, 자기감정을 설명하려 했다. 

“내가 생각할 시간을 좀 주면 안 될까. 그걸 되돌아보면 다를 수도 있잖아.” 

“그래, 그래라.”라고 남자는 식식거리며 자리를 떴다. 

“제발, 내게 시간 좀 줘.”라고 여자는 남자의 등을 보며 외쳤다. 연애 때부터, 여자가 묵언 수행을 하는 것처럼 눈빛으로 그를 원망할 때면 남자는 그녀의 뒤에 앉아서, 무엇 때문인지 말 좀 하라고 재촉했다. 어쩔 때는 자기가 무조건 잘못했다고도 했다. 잘 하겠다고, 관심을 더 주겠다고 언약을 하기도 했다. 여자는 그럴 때마다 더 깊은 자기 대화에 들어갔다. 어떤 결론에 이르면 박차고 나와, 여름처럼 웃었다. 해맑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으로의 침잠에서 여자는 모든 것이 자기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그와는 별 상관없었다. 인내심 없이 알짱거리는 남자가 여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여자가 처음 진지하게 사귀었던 남자는 화가 나면 입을 닫고 두문불출 발언권을 포기했던 여자에게 매달렸다. 남자는 뭘 잘 못했는지는 몰랐다. 무엇인가 떠날 때, 그 떠나는 것이 아쉬우면 따라간다. 자신이 띄운 감나무 잎이 수로에 떠내려간다. 어디까지 갈까, 수로에 낀 이끼와 잠긴 나뭇가지에 걸리진 않을까. 다리 아래로 들어간 나뭇잎이 나오지 않을 때는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그리고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안도감이란. 남자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나뭇잎을 지켜보고, 그와 이어지고 싶은 마음에 안달 내는 것 같았다.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 어두운 다리 밑으로 숨이 막혀도 들어갈 만큼, 무모한. 

그때, 여자는 그게 남자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안다. “나 때문이야!”라고 자각하고 나올 때까지 기다릴 곰 같은 인내심이 남자들에게는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남자에게, 이성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여자는 그의 따뜻하며 억센 매달림을 거절했다. 애초럽게 비에 젖은 짐승처럼 초라하게 살려달라고 손목을 잡는 남자를 매몰차게 뿌리쳤다. 

여자는 남자의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여자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남자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이 우리가 그 자리의 자신과 대화를 그 자체로 보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과거의 해결되지 못한 감정에 매달리고, 내 앞의 현실은 그 감정의 기억, 감정의 늪에서 균형을 잃고 빠져 들어간다. 잠시, 거리를 두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걸, 알아차릴 것이다. 

나른한 오후, 남자는 식탁에 앉아 있는 여자를 안았다. 

“미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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