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Karma)란?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네이버 사전)
엄마가 말하는 카르마
엄마는 할머니가 엄마한테 그렇게 못되게 구는 것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고 했다.
현생의 엄마가 있기 전에 전생에 어떤 존재가 업을지었고, 과보를 지금에서야 받으며, 그래서 엄마가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고, 이런 의지로 구박을 묵묵히 이겨내는 엄마는 대단하다. 다만 이런 운명적인 인생관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수 없다. 우리 엄마 세대는 대다수 그런 삶의 전형을 살아왔을거다. 엄마는 까르마 때문에 인생은 힘겨울 수밖에 없고,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엄마에게 공덕은 선하게 살고, 남을 배려하고, 또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꼭 닮은 엄마와 나
엄마와 나는 성격이나 행동 패턴이 닮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상냥하면서 엄마에게는 설명이 귀찮고, 무턱대고 화가 난다. 엄마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묻지도 않는다. 나도 그렇다. 엄마가 내게 그렇듯이. 책을 읽고 이런저런 시도는 하지만, 그때뿐이다. 한 발자국 다가가야 하는데, 다른 곳을 보았던 과거의 엄마를 기억하며, 엄마가 말을 걸면 무심하다. 고치려고 해도 잘 고치지가 않는 버릇이다. 이게 까르마와 다름없다.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과거에 업이 있었고, 지금 과가 있다.
한국에 가면, 동네 할머니가 매번 묻는다.
‘엄마 안 보고 싶었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라고 답한다.
‘딸 보고 싶었지?’엄마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
‘애들이 보고 싶었지.’
이상하다. 둘째를 낳았을 때 엄마는 독일에 오지 않았다. 나 혼자 몸조리를 했다. 애들이 보고 싶었다는 사람이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아이의 얼굴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내가 엄마를 보러 가기 전까지.
엄마와 나는 말로 표현을 잘 못한다.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좋을 텐데. ‘내가 못 가서 미안해. 애 낳는다고 고생했다. 힘들었겠다.’ 이런 말이 듣고 싶었다.
‘엄마 당연히 보고 싶지요. 4년 만에 한국에 온걸요.’ 그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엄마도 그 말이 힘들겠지.
쌓이고 쌓인 감정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랑을 못 받은 건 아닌데, 엄마 마음을 이해하는데, 엄마 마음을 곧 죽어도 말로 듣고 싶다. 그래서 전화할 때 갑자기, ‘하이디하고 알베르트는 잘 지내? 전화 자주 해.’ 그 말이 그렇게 싫다. 내 안부는 안 묻고, 먼 관계의 시부모를 먼저 묻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자기 수행이 먼저다
엄마와 나, 우리는 유전자를 공유한다. 엄마가 업을 지어서 지금 현생에서 고통받고 있고, 종교활동과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어 공덕을 쌓는다고 한다.
나는 내 안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한다. 종교보다, 남들보다 자신과 아들, 가족에게 집중하면서 긍정적인 삶을 구축하고 싶다. 부모의 인생을 연구하면 자신의 인생을 볼 수 있게 된다고 하지 않나. 누구라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가족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져 보면, 나아갈 방향이 보인다. 보살은 대승불교가 보는 이상적인 수행자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구도자를 보살이라고 한다. 엄마가 종교에 귀의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서원(誓願) 하는 수행 형식을 따른다면, 나는 선근 공덕(善根功德)의 회향, 즉 나 먼저 수행한 다음에 어찌 됐든 다른 사람을 도와주겠다는 방식의 수행법이다.
엄마와 내가 그렇게 닮았어?
엄마는 자기만의 계획이 있고, 어떤 프로젝트에 열중하다가 기력이 소진되면 간혹 소강상태를 가진다. 일에 몰두하면, 현실적이어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종교집회에 참여한다고, 나를 떼어 두고 사라지기 일쑤였다.(하늘이 무너질 듯한 그때 감정이 생생하다. 나는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세세하게 설명해 준다. 내가 아니라도 아빠가 널 돌봐줄 거라고. 한 시간 후에 올 거라고.) 자기 삶이 중요해서 독일에 오지 않았다. 사실 오기가 쉽지 않은 것도 이해는 한다.
나도 그렇다. 직업 코칭에서 코치가 단번에 알아냈던 것처럼, 한 가지 프로젝트에 빠지면 다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에너지를 태우기 때문에 쉽게 번아웃이 된다. 내 일이, 내 삶이 아이보다 더 중요하다. 적어도 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일에 빠져 있는지 설명해 준다. 엄마는 자기만의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도 간혹 말한다.
상황 1
‘엄마 사과 어디 놔뒀어?’
‘거시기 거기 거. 뒤쪽에 있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나도 어느 순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닌 다른 것이 입에서 나오고, 대충 말해도 사소한 물건은 관찰해서 알아서 찾아줬으면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눈앞에 장난감도, 냉장고 가장자리의 버터도 찾지 못하는 남자 셋과 살고 있다. 덕분에 물건을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한 표현법을 잘 배워야 한다.
상황 2
의료보험에 대해서 물었다고 치자. 한참 새언니가 설명을 했다.
‘나는 무슨 말 하는지 몰라.’ ‘안 들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라고 새언니가 농담을 했다.
나도 별 관심도 없고, 자기 생각대로 하겠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엄마가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사실을 감안하면, 엄마는 잘 못 알아듣겠고, 다시 한번 더 설명해달라는 의도이거나, 어느 부분이 진짜로 잘 들리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거다. 이것은 일종의 소통의 오해다.
“엄마는 네가 말 안 하면 몰라.” 아이는 묵비권을 자주 행사한다. 그럴 때면 다급해서 이 말을 한다.
‘네 마음을 엄마가 알게 좀 표현 좀 해줘. 그러면 엄마가 뭐라도 해줄 수 있을 텐데. 엄마가 이해할 마음이 있으니깐. 네 마음 좀 얘기해 줘.’라는 뜻이다. 실상은 어감이 좋지 않은 이런 말이 불쑥 나온다. 까라마다. 부드러운 말로 고치면 된다.
나는 엄마와 유전자를 공유해서, 같은 행동 패턴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에서도 엄마와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다.
나도 구하고 아이도 구하는 법
자기 인식과 수행으로 업보의 인연을 끊어낸다. ‘자기 이해’ 괴로움을 주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의 첫걸음이다. 이것 또한 공덕을 쌓는 길 중에 하나. 아직 내 그릇이 작아서 중생을 구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구하고 아이들도 구할 수는 있지 않을까.
카르마는 수행과 '자기이해'로 극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아이에게 돈 대신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전승하고 싶다. 유전자를 받은 내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기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급한 성질을 이겨내며 아이들에게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돌볼 수 있는지,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가르쳐 주고 싶다.
우리는 운명처럼 질풍노도의 시기를 여러 번 맞는다. 대부분 그런 시기를 거쳐야만 한다. 그 시기에 내가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거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 주는 것.’ ‘우리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 ‘우리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 그 시기를 지나도 우리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으니깐, 그것을 인식하고 당황하지 말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 그것이 아픈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는 비결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