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독커플 연애, 결혼 스토리

by 원더혜숙

중국 가기 전에 감이 왔다

거기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조교 일과 교수님 도와주는 일, 강독 스터디로 바쁘게 지내고 있을 즈음, 중국정부 장학생에 뽑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까지 한자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중국인 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당시 남자 친구랑도 헤어지고 일본에서 돌아온 지도 오래되고 몸이 찌뿌둥하던 참이었다.

<중국견문록>의 한비야처럼 대륙에서의 공부가 설렜다.

2008년 9월 3일 우한 도착! 날은 후덥지근하고 안개는 자욱.(3년 반 동안 그 안개가 그치지 않을 정도로 우한은 공기오염이 심했던 듯하다) 여자 튜터 두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인 남자 한 명이 허름한 하얀색 봉고차에 올라탔다.

그가 내 앞에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려고 내가 여기 온 거구나.’

영어는 못 했지만, 일본에서의 경험을 믿고 선뜻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어?”

“아, 브라질에서 왔구나. 중국어는 얼마나 공부했어? 이름이 뭐야?”


브라질인은 처음이라, 보통 브라질 사람 중에 파란 눈에 갈색 머리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단 외국인이니깐, 또 나처럼 중국 말도 어눌하니깐, 착하게 보이니깐 그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 문득 그와 결혼하는 상상 속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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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외국인들과 중국인 앞에서 우리는 빨간 중국 전통 혼례 의상을 입고 있다.

중국식 전통 결혼식을 치러 준다는 그들의 행사에 우리가 참여하기로 했다. 뭔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빨간 옷을 입고, 남자친구는 “우리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살자. 내가 잘 할게.”라는 말을 몇 번이고 외웠고, 친구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우리는 가짜 혼례를 올렸다. 4년 후에 우리는 눈, 비, 바람 부는 어느 봄날, 한국 시골 체육관에서 진짜 혼례를 했다. 아들딸은 아니지만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장 보고, 밥 먹고, 놀면서 인연이 깊어지다


외국인 사무실에 가서 등록하고, 호텔에서 기숙사 키와 이불을 받는 일, 다음 날 튜터랑 휴대폰도 만들고 은행 카드도 만들고, 학교 식당 카드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 양쯔강을 배를 타고 건너, 우한 중심지를 구경하고, 학교 앞 식당에서 밥도 같이 먹었다.

쇠 젓가락보다 얇고, 보통 나무젓가락보다 짧은 젓가락에 충격을 받았는데, 너무 얇아 거머쥐면 흐물거리는 투명 플라스틱 일회용 컵도 신기해서 웃음이 나왔다. 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식당에서, 일 량 미 쌀로 지은 찰기 없는 밥을 먹으며 나와 그 남자는 히죽히죽.

까르푸에 가서 화장지와 칫솔, 샴푸 등 생활용품을 사고, 학교 시장도 들르고, 거의 매일 두 끼 그와 함께 했다. 우리는 짧은 중국어로 용케도 소통할 수 있었다.

학기 시작 전이었고, 그 즈음 도착한 다른 외국인 친구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고 우리끼리 놀았다. 친구는 튜터와의 모임에 나를 불렀지만,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친구는 도와주려 했지만 말 한마디 못하는 내게 모임은 가시방석이었던 반면에 벙어리 외국인 남자랑 어울리는 게 훨씬 편했다. 유유상종.

그는 B동, 나는 C동, 내 방 문을 열고 그를 부르면 그가 창문으로 대답했다. 친구도 별로 없어 보이는 이 남자에게 또 까르푸에 가자고, 밥 먹으러 가자고, 문자를 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나의 베스트 프렌드 밍이와 그녀가 짝사랑하던 중국인 남자와, 나, 그 남자 넷이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는 중에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 이야기는 다른 편에 있어요.)

그와 계림, 황산, 무당산, 상하이 여행을 다니면서 행복한 3년이 흘렀다.


문화 차이는 없었을까?

세상 모든 여자가 다 그런가.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이 남자에게 서운했다. 연락을 하지 않으니깐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서러웠다. 한국 남자라면 그런 것은 잘 알 듯한데, 그가 그렇게 무소식이면, 기다리다 못해 내가 주동적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갑자기 잠들어서, 혹은 약속을 잊어버려서 같은 기숙사라도 몇 분씩 늦고 했는데, 그가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이 어린 계집애 같아서 속상하고,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바보 같아서, 학교 운동장 한편에 앉아서 훌쩍훌쩍.

결혼에 골인하기

3년 반 석사를 끝내고 귀국을 하는데, 남자친구가 한국 여행을 하고 싶어 했다.

“엄마! 나 외국인 친구 한 명 데리고 집에 갈게.”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올케언니는 페이스북으로 이미 눈치를 챈 것 같다.

그렇게 외국인 친구 한 명을 집으로 데리러 갔는데, 엄마는 별 반응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남자친구의 밥에 생선을 올려주는 걸 보고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막내로 지 생각만 하는 이기적인 딸이, 남자를 챙기는 것을 보며 사람 구실한다고 안심하지 않았을까.



어떤 생각이었는지, 졸업 후 상하이에서 일하는 그를 따라갔다. 엄마는 그렇게 상하이에 동거를 하러 가는 나를 말리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박사가 목표였는데 석사를 마치더니, 박사 얘기는 함구하고 시집을 간다고 하는 딸을, 그것도 외국인 사위를 엄마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말려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을 거다. 엄마도 나랑 똑같이 말 안 들으니깐. 아무래도 남편이 마음에 들었나. 그때도 지금같이 그는 느릿느릿하고, 항상 오케이 하는 사람이라 서글서글하게 보였을거다. 그렇게 4년 만의 연애를 종결하고, 그는 내 전 남자친구가 되었다


결혼반지를 사려고 홍콩 금방이라는 금방은 다 들어간 것 같다. 그는 홍콩에 유명한 빌딩 라운지에서 프러포즈를 해야 한다는 내 무언의 압박을 받았었지만, 마음에 든 심플한 반지는 떠나는 날 아침에 겨우 살 수 있었다. 로맨틱한 청혼은 까탈스러운 내 취향 때문에 물 건너 갔고, 남편은 장미꽃과 파파존스 피자를 두고, 상하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청혼했다. 완벽한 청혼은 아니었지만, 결혼이라는 게 뭔지 잘 모르지만, 그와 함께 지내고 싶은 것만은 확실했다.


무드 없는 한국 여자와 평화주의자 독일 브라질 남자

사실, 상하이에서 일을 하다 나를 보러 학교에 돌아왔던 그는 내게 떨면서 목걸이를 주면서, 청혼을 했다.

“아니, 목걸이로 청혼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리고 여긴 학교 공원이잖아. 로맨틱하지 않아. 다시 정식으로 해.”

참, 시종일관 무드 없는 여자였다.

남편은 그때 그런 중요한 순간에 불평을 하는 여자를 알아보고, 달아났어야 했다. (“그래도 네가 나를 지지해 줄 때가 많아.”라고 남편이 말한다.)


첫 키스 때도, 그가 상하이에 놀러 가서 처음으로 큰 선물을 했을 때도, 청혼 때도, 홍콩에서 반지를 고를 때도, 한 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그는 여행도 가자고 하면, 그러마. 했고, 독일에 가서 살자. 해도 그러마 했고, 이직해야지 해도 그러마 했고, 이제 또 이사하자 했더니 그러마 하고 웃는다.


우리가 지금까지 안 싸우고, 잘 지내는 이유는 남편의 유들유들한 성격에 있다는 것을 최근에 들어 알았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easy going 한 스타일인 그는 한결같이 평화롭고 기분이 좋다.



혼신 신고는 오랫동안 걸렸다. 상하이에 살면서 남편이 베를린(출생지)에 가서, 미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공증을 받고, 또 나 역시 같은 서류들을 받고 공증하는 등 장장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 결혼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혼인 신고도 하루 종일 걸려 겨우 했다.


“혼인 신고하는 거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렸어, 우리 이혼은 귀찮으니깐 말자!” 남편 말이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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