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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혜숙 Nov 09. 2022

[습작] 단편 영화







여름 학교 축제가 끝났다. 무대 위의 따뜻한 핀 조명, 관객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 마이크의 확성된 세나의 음성이 아직도 귓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 계단을 내려가 1층 1학년 교실을 지나가면 후배 몇 명이 세나를 쳐다봤다. ”저 선배 축제 때 성대모사했잖아. 얼마나 웃겼는데.” 못 들은 척했지만 세나라는 이름은 스피커를 대고 말한 듯이 크게 들렸다. 언젠가 떼어버리고 싶었던 교복 재킷의 어깨 뽕이 그날만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나가 졸업 후 같은 고장 길에서 우연히 지나치면서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냥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같은 자취방에 사는 영희와 같은 면 출신이라 했다. 같은 반인데도 말을 섞은 적이 없어서, 진심으로 안녕이라고 말 못 할 것 같아 손만 흔들고 있는데 지연은 투명한 안경 렌즈 두께를 자세히 볼 수 있을 만큼 세나에게 다가왔다. 지연은 자취방 아줌마처럼 푸근했다. 둥근 턱 선과 동그란 무테안경 아래 크게 쌍꺼풀이 진 눈도 동그랗다. 지연은 종이 뭉텅이를 들고 세나 앞에서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서 단편 콘티를 써 놓은 게 있어. 네가 주인공으로 딱 맞아. 네가 무대에서 성대모사하는 거 보고 저런 끼라면 연기도 잘 할 수 있겠다고. 연극부 애들에게 부탁할까도 생각했는데, 대사보다도 동작과 표정으로 말하는 게 많고, 그냥 네가 생각나더라. 연기 한번 해 볼래?”




세나는 무대 위에서 대사를 외던 연극부의 모습을 관객석에서 지켜본 적 있다. 허공을 더듬듯 손짓하고 어색하게 몸을 돌리고 격양된 어조로 독백을 하던 간디학교 연극부 학생들의 모습은 멋지기보다는 닭살이 돋았다. 그 끔찍한 부끄러움을 참을 수 있을까, 축제 무대의 짜릿함이 핏속에 남아 있었던 세나는 대뜸 “그래, 한번 해 볼게.”라고 승낙했다.




지연이 건넨 A4 프린트 앞에는 큰 글씨로 ‘수제비’; 주연: 000, 감독: 김지연, 장르: 단편 영화라고 쓰여 있었다.


“한번 읽어보고, 다음 주부터 영화 찍기 시작할 거야.”




잘하든 못하든 이런 경험은 평생 가도 있을까 말까다. 고2 여름, 세나는 자신이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했다. 지금 놀아야 한다. 고 3 때는 공부만 해야 하니깐.




세나는 시골집에서 돌아오는 길,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언덕을 올라 여고 옆 자취 방에 불을 켜고 냉장고에 반찬을 차곡차곡 넣어 놓고 학교로 갔다. 지연은 텅 빈 교실 책상 위에 수제비와 젓가락을 올려놓고 세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 감독이고, 너는 연기자야.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내면 연기에만 충실하면 돼.”


“어, 그래.”




세나는 추미근에 힘을 주었다. 엄마가 오빠 보고는 아무 소리도 안 하면서 나보고는 방 치우고 설거지하라고 할 때, 귀찮은데 오빠가 심부름 시킬 때, 주말에 쉬러 집에 갔는데 농사일을 도와 달라고 할 때. 또 배가 고픈데, 수제비는 맛있을까? 세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실감 나게 잘 찌푸렸다.




“컷트, 그러니깐 미간에 음영을 가미하는 거야. 아까 너 딴 생각 했지? 미세하게 떨리던데.. 좀 더 집중해 줘, 너는 그 부추가 미치도록 싫은 거야. 수제비에 부추 넣지 말고, 싫다고 아무리 말해도 잊고 계속 넣는 엄마에 대한 분노, 그렇게 즐겨먹던 수제비마저 싫어질지도 모르는 위기, 한 여고생의 작은 집착과 분노가 그 미간 주름에서 나타나야 해.”


세나는 감독 말대로 부추에만 집중하고 그간의 분노와 짜증스러움을 미간에 모았다. 그리고 수제비에서 길게 썬 잔디 같은 부추를 성형외과 의사처럼 하나씩 건졌다.




지연은 찍은 영상을 돌려 세나에게 보여주었다. 소형 비디오카메라에 담긴 짧은 컷들이 어떻게 영화가 되는지 세나는 알 길 없었다. 그런 걸 하는 지연이 대단해 보일 뿐.




“안경을 벗고, 정말 골치 아프다는 듯이. 그런 다음에 지긋이 수제비 위에 부추를 노려보는 거야. 부추 vs 너의 에고 싸움 같은 치열한 결심 그런 거. 그리고 이 부분이 되게 중요해. 코를 벌렁벌렁거려야 해.”


이런 건 왜 하나, 이해가 안 됐지만 미래의 영화감독이 그러라면 그러는 거고. 일단 세나는 코에 쥐가 날 정도로 코를 벌렁거렸다.



“참 그리고 코를 벌렁 거리는 거야. 거기에 내가 클로즈업할 거고.”




영화 촬영은 계획한 것의 반을 넘겼다. 저녁이 깊었고, 수위 아저씨가 교실에 남아 영화를 찍던 세나와 지연을 발견하고 주의를 줬다.



“학생들 어서 하고 집에 가도록 해. 날이 어두워졌어.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오 분 후 수위 아저씨는 돌아와서 웃으며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두 개 건넸다.




세나와 지연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데, 주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걸릴 게 걸렸다는 듯 짝발을 집고 그 둘을 쏘아봤다. 입은 거칠었다.


“이노무, 새끼들.”




그의 평소 어조가 그대로 귓가에 꽂혔다. 주임 영어 남교사는 독일어 전공에서 영어로 바꿨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발음은 거칠다고. 그날 새끼의 새의 시옷에서는 사랑의 시옷보다 셰이크할 때 몇 개의 자음들이 섞인 발음으로 두 여고생을 부르고 때렸다. 직모 긴 앞머리의 안경에서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지연과 세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먼저 카메라를 숨기고, 짐을 주섬주섬 쌌다. 수제비를 봉지에 넣고 신문지의 부추를 뭉치는 와중에 주임의 말이 들렸다.


“누가 이런 거 시켰냐? 공부할 시기에 수능을 앞두고 … “




이런저런 수업 중의 절반을 차지하는 잔소리 레퍼토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에게 최대한 얼굴을 숨겼다. 그저께 수업 중에 영어 교과서를 세워 두고 그 안에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책을 읽었다가 교무실에 불려 갔는데, 그가 내 얼굴을 기억하는 한다면 두 배의 잔소리와 그의 한심하다는 듯이 째려보는 얼굴의 데자뷔를 다시 봐야 할 테니깐.




“아버지 뭐 하시노?” 그가 시골 지주, 정치인 부모님을 둔 학생에게는 꼬리를 살랑살랑 내린다는 소문을 세나도 들었다. 거기서 왜 아버지를 찾는지 알 수 없지만 세나는 기분이 나빴다.




세나는 지연에게 속삭였다.


“주임, 술 냄새 안 나냐? 발음에서 술 냄새나.”


“아, 술 마시고 통닭 들고 들어와서 잔소리하는 드라마 속의 아버지처럼 그치?”


“이 자슥들이, 뭘 그렇게 꾸물거려. 얼른 꺼지지 못할까?”


“야 이번에는 자기가 대감이라고 생각하나 봐.”




지연이 웃었다. 둘이 키득키득하는데 주임은 또 여고생들을 예리한 눈으로 총을 쏘았다. 어쩌면 포즈를 다르게 쥐었다. 없는 회초리를 휘두를 듯이 반복해서 팔을 좌우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 이제 코치 놀이 하나보다. 체육부 벌칙 오리걸음 시키 전에 얼른 도망가자.”


뒷문으로 가려다 문이 잠겨 있어서 앞으로 나오면서 주임의 술기운이 확 끼쳤다.


“이노무 새끼들아. 인사는 하고 가야지.”


“아, 선생님이 안녕히 주무세요.”


“술은 잘 깨시고요.”


지연이가 조용하게 내 귓속에다 속삭였다.


“너는 정말 대담해.”


“그러니깐 영화를 만들지 않겠어? 두고 봐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너무 유명해져서 이 옛날 작품이 소개되면 너도 유명해질 수도 있겠지.”


“대담한 사람이 나보고 먼저 나가라고 그렇게 뒤에서 밀었어? 신문지에서 부추가 하나씩 떨어지는 거 알았어 몰랐어?”


“장남문 그거 밟고 미끌어저뿌라.”


“장난 문 좀 치지 마세요.”


“와하하하”


“그 입을 틀어막아라.”하고 지연이 세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창문으로 주임이 고개를 내밀어 외쳤다.


“꺼지지 못해. 이 새..끼들”


그의 목소리가 학교 운동장을 울렸다. 여고생 둘은 쏜살같이 학교 어두운 학교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여름 소매와 치마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목련나무에 걸린 달이 청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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