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소설 연재 1
유자차와 국화차나 어울릴 듯한 별채 같은 시골 유일한 카페, 파란 지붕에서 모이기로 했다. 정은 순희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앉을 곳을 찾았다. 몇 해만인가. 고향에 돌아오면 만나줄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면서도 단물 나기까지 씹어야 하는 딱딱한 껌처럼 말랑해지기까지 어색한 시간은 존재하기 마련. 나는 괜히 매끈매끈한 나무 둥지 통 테이블의 니스 칠을 물끄러미 보다가 방바닥의 따뜻한 기운에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몇 십 년 만에 만나는 정은은 내 눈을 피했다. 자기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낯선 이를 만난 것처럼.
“진짜 오랜만이다.”
굳이 그녀를 안 만나도 됐지만, 순희와 연락을 하던 정은은 가까이에 산다는 이유로 시간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 만남에 응했다. 초등학생 6년, 중학생 3년, 고등학교까지 동창생이니 그 사이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어도 안 만났어도 서로에 대한 기억은 많았다.
중 1 영어 수업에서 영어 본문을 외워야 했다. 첫 번째 주자로 정은이가 교탁에 올랐다. “It was cloud.” 그런 발음을 나는 생전 처음 들었다. 목청에서 막힘없이 거친 듯 속삭이듯 나오는 클라우드를 시작으로 멋지게 통째로 영어를 외우던 그녀. 더 어렸을 적은 옷 수선과 옷 만들기를 취미로 하던 그녀의 엄마가 딸을 모델 삼아 예쁜 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날 정은이는 식탁보처럼 두꺼운 천으로 만든 화려한 무늬의 파란 미니스커트를 연신 내리면서 불편하게 정글 짐과 그네를 놀았다. 철봉을 하려고, 올라가는데 정은 신발을 구개 신고 초록 핏줄이 다 터질 듯한 흰 다리만 남겨둔 채 얼굴이 벌겋게 하고 싱긋 웃었다.
그저께 우연히 고교 도시에서 만난 그의 아들은 좀 어리숙한 듯한 엄마 인상을 어쩜 그렇게도 닮았는지. 아이가 집중을 못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가 태권도를 수준급으로 잘한다는 말에 안심을 했었다. 아직도 곱고 잘 빠진 얼굴선, 복숭아처럼 솜털이 나고 파란 핏줄이 다 보이는 흰 살결은 변하지 않았다.
"세나 너 그때 소연이 되게 좋아했잖아.”
타인의 기억 속의 나는 지울 수 없었다.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당당하고 싶은 나는 갑작스러운 정은의 질문에 서늘해진 등을 숨기려고 어깨를 작게 웅크렸다. 다 식은 국화차를 한 모금 마시고 쿠션을 하나 움켜잡다가 케이크에 뻗었던 손의 속도를 낮추었다.
“그때는 그랬지.”
치즈 케이크를 꼭꼭 씹으면서 생각했다. 원래의 나처럼 옛날의 고민과 진실을 몇 해 만에 만난 친구에게 남김없이,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니깐 고백할 건가 아니면 아니라고 생까던가. 그 사이 정은의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들이 영어 학원에 안 가고 축구하러 갔다네.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오늘은 일단 여기 나왔고. 그나저나, 애들 영어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일단 학원은 보내는데…”
“엄마가 해야지, 아들도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라 하지는 않나 봐.”
“그걸 못 하니깐 학원에 보내지. 여기 천에도 교육에 관심 있는 엄마들은 자기끼리 모여서 영어 회화도 하고 독서 모임도 하고 그러더라. 나는 사는 게 바빠서 직접 가르치는 에너지와 그 노력을 하기엔 피곤해. 고교 지역은 학원비만 해도 몇 백만 원 한대. 거기가 시골 치고 대기업 직원, 법원 사람들까지 모여 살아 우리 학교 다닐 때부터 교육열이 높았잖아. 그래서 얕볼 게 아니라 수준이 높아.”
“너는 몇 개 외국어 하냐? 영어, 독일어, 중국어 하고 일본에도 있었다고 하던데…”
“어, 그러니깐 나는 스스로 하기 때문에, 아이가 그걸 하는 게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아. 스무 살이 되어서 외국어 공부를 제대로 시작했으니깐. 우리 애들은 이미 삼중 언어에서 성장해서 외국어에 대한 친근감을 가지니깐 그게 유리할 수는 있겠다.”
“그게 완전히 다른 시작인 거지. 우리는 그걸 돈 들여서 해야 하고 여기서도 이중언어로 키우는 엄마들도 있어. 그런 걸 어떻게 하는지. 학원 보내는 것도 힘든데. 그렇게 하는 이유가 다 아이들의 뇌가 스펀지처럼 언어를 습득할 시기를 놓치지 않는 거라는데…아 나는 모르겠다.”
지나가는 카페 여주인을 보고 순희가 말했다.
“여기 가게 주인이 우리 언니 친구래. 그래서 우리보다 한 해 더 높을걸.”
“고향에 내려오고 애들이랑 갈 데 없어서 여기 오면서 나도 언니랑 얘기해 봤어. 진용 언니랑 되게 친했다고 하더라. 몇 년 동안 해외에서 나가 살다가 촌에 들어와서 카페 한다고. 이 도자기 폴란드에서 들여온 거잖아. 내가 이거 싸게 사려고 알아봤거든. 수제라서 각개가 하나의 창작품이라 할까.”
그때 또 다른 한무리가 들어왔다. 낯익은 얼굴이 세 명.
“아, 저기 봐, 걔잖아. 사팔뜨기인데, 쟤가 얼마나 여신데, 난주랑 같이 놀다가 난주가 생각보다 자기 마음대로 안 넘어오는 거 보고, 다시 등 돌리더는 거 아니라. 만날 때마다 얼마나 잔망스러운지. 다 아는 나는 못 봐주겠어.”
진선이라고 했다. 선배라고 살갑게 인사하고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잘 쉬고 가라고. 만나서 반가웠다고 생글거리며 인사하고 카페 다른 쪽으로 들어갔다. 순희가 물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애들이랑 연락해?”
“아니, 전혀.
“미나도 집에 있다는데 안 불러내면 마주치는 일도 없고. 참, 나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고등학교 동창생들 가끔 보는데, 2년 전인가 애라 적십자 병원에서 만났다이. 유방암 4기라고. 나도 바빠서 그때 몇 마디하고 지나쳤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죽었다카대. 우리 첫째 두 돌 때였는데… 딱하데이.”
“너랑 친했잖아.”
“어 그랬지. 나도 연락한지 오래됐어. 해외에 있으니깐. 그랬구나.”
"독일 교육은 어때? 발도르프 학교나 몬테소리 이런 거 유명하잖아....
언제처럼 옛날의 누구의 기억과 소식을 이어가며 우리는 지금 우리를 잠시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