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는 가볍게 법원 사거리를 꺾어 죽전 언덕 길을 올랐다. 수학 정석을 잘 가르치던 학원에서 밤늦게 수업이 끝나고 친구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따라 걷던 길, 쉬는 시간에 궁전 맨션 앞 분식점에서 떡가래 떡볶이를 사 먹는다고 가본 죽전 길의 끝은 고교의 정문이 되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문이나 후문이나 등교하려면 여고생들은 매일 언덕까지 바위를 끌어올리는 벌 받는 시시포스처럼 가방을 메고 이 언덕 길을 올라야 한다. 종아리가 굵어진다며 치마 대신 치마 아래 체육복을 입는 건 그런 튼튼한 다리를 감추기 위해서라는 논리에 맞지 않는 변명을 하던 여고생들은 짓궂은 학교 설립자를 언덕의 정점에서 욕했다.
아스팔트 기름냄새가 나는 넓은 새 죽전 길에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공사 중이라 황토색 교정 운동장에 주차했다. 졸업 후 어떤 다른 건물이 운동장 한쪽에 더 들어선 것 같은데 확실히 그게 뭔지 모르겠고, 얇은 자주색 교복 재킷 대신 두꺼운 네이비 울 코트를 입은 내가 그것도 수업 한창인 오전에 교정을 들어서고 있어서 부끄러우면서도 더 이상 학업의 무게가 없다는 사실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얄궂은 손님용 실내화를 신고 미끄러운 마룻바닥을 끌면서 여고 행정실에 들어섰다.
“어떻게 오셨어요?”
책상 네 개가 행정실을 꽉 채웠고 가습기에서 푹푹 수분 구름이 찌고 있었다. 그중에 제일 젊은 언니가 응대했다. 어딘가 낯익다. 지목하기 힘들지만 이 고장은 몇 다리만 건너면 지인이고 동창이며 친구의 친구 이런 식이다. 사과 조합 장에 가면 내 친구의 언니가, 농협과 새마을에 가면 어색한 남 동창생이 턱 자리를 잡고 있으며, 카페에 들어가면 아는 언니의 소꿉친구, 오빠 친구의 아내 등등의 좁은 관계 속에서 나는 어디를 가도 관계에 묶여 있었다. 그녀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거나 통학 버스를 함께 탄 적이 있거나 아랫동네 이웃일지도 몰랐다.
내 귀국 여행은 한 달 만에 종료될 것이다. 돌아가면 나를 알 만한 사람이 지나가도 아시아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구분하고 싶지 않은 독일인들 사이로 재빨리 사라지면 그만이었다. 그들은 내 작은 까만 눈동자가 움직이는 방식이 그들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얼굴을 했다. 그게 오히려 편하기도 한데 한국에서는 어쩔 수 없다. 나의 표정 변화에 미세하게 떨리는 감정 분자들까지 읽어내는 자들이 있다. 어쩌면 모나미 볼펜을 들고 주름 개수를 세고 어느 성형외과가 보톡스를 안 아프고 주사를 잘 놓는지 추천까지 할 참이었다. 딱 한 달, 그 끈적한 섬세함을 견디면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문 성적표와 졸업 증명서 좀 떼려고요.”
나는 뿌연 스무 살 적 사진이 희미하게 박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사무실 한쪽에 가만히 앉았다. 행정실 창가에는 난들이 즐비하다. 주둥이에 갈색 띠를 두른 늘씬한 아이보리 화분, 화분에 난의 모양으로 음각을 넣었다. 갈겨쓴 한자를 보면서 어디에서 보낸 것일까 추측하는 중, 앞에 앉아 있던 직원이 귤을 먹으라고 하나 준다. 고국의 정은 이런 것인가. 나는 자신과 비슷한 포즈로 걷고, 튀어나온 광대뼈로 웃고, 노란 얼굴빛을 가진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알아들어 편하기도 했지만 불쑥 자기 것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주란이와 앉아서 가을 햇살을 쬐며 우리 사이가 좀 친해진 것 같아 뿌듯했던 그 벤치는 여전했다. 학교 건물 앞에는 목련이 하얗게 피었다. 겨울 같은 봄이었고 덕유산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은 이미 사철나무에 무릎을 꿇고 늘씬한 목련의 가지에 흰 꽃을 피우고 자취를 감췄다.
교실에 앉아서 백목련을 감상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아들이 턱시도를 입고 정은의 피아노 반주에 목련화를 불렀다. 이미 변성기를 겪은 그의 낮고 곧은 목소리가 그의 꿀렁거리는 목젖을 나와 강당을 울렸다. 첫 경험은 각인된다. 그 후로 목련을 보면 6월이 오면 나는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의 사랑 목련화야, 너의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핀 가인과 같고.”
목련은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백목련의 꽃잎은 순수한 처녀의 모습을 연상한다. 희고 순결하여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고 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목련을 보며 애란을 생각했다. 착하고 단순한, 단순해서 순수했던 영혼.
정식 교사가 되면, 나와 딸 손자까지 그 선생님의 제자가 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역사 있는, 달리 말하면 후진 교육과 불투명 재정의 상징 사립 중학교를 다녔다. 그런 곳에서는 젊은 교사는 이벤트였다. 노련한 물리 여교사도 사십은 훌쩍 넘어서 우리는 그녀의 목주름을 체크하는 사이, 키스 자국이 남았나 안 남았나 세기까지 했다. 몇 개의 분교에서 새 얼굴 영입이 있다 하더라도 촌 중학교에서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대로 올라갔다. 새로울 게 없다. 나는 근교 도시로 유학 갔다. 교육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작은 도시에는 고등학교만 다섯 개나 되었다.
각 면에서 성적 상위 10퍼센트의 여학생들이 전부 모인 서부 경남의 거의 유일한 여고라고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교사 전근과 보충이 있었고 매 학기마다 대구에서 교생이 와서 실습했다. 군에서 예쁘고 공부 잘하고 예능 재능이 많은 여자애들이 거진 다 모인 셈이다. 시골에서는 피아노와 지휘가 고작이었는데 동급생 유진은 바이올린을 켰고, 미영은 첼로를 한별이는 성악을 했다. 여고에서는 한 해 여러 명의 서울대 합격이 나오기까지 했다. 바로 옆의 사립 고등학교야 그렇다 치더라도 시골 공립 여고에서 그런 결과는 대단한 거라고 입 마르게 들었다. 내가 살던 시골 지역 고등학교에서는 서울대는 언감생심을 거다.
새 학기 반 배정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몇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담임은 일본어 여교사로 새 부리 같은 작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쌍꺼풀이 진했다. 좁은 턱에 촘촘히 엇갈린 치아와 덧니와 비음을 고루 섞어 일본어 발음을 하면 일본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예뻤다. 선생님이 새 교과서를 나눠주고 잠시 사라졌다. 좌중에는 온통 낯선 얼굴만 가득해서 얼굴을 돌릴 수 없었다. 돌아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서로 어색한 느낌을 감추기 힘들었다.
아는 얼굴들끼리 몸을 돌리거나 마주 보고 새 학기의 긴장을 풀고, 짝꿍이 된 애들은 통성명을 하고 출신을 밝히는 교실 여기저기 웅성웅성했다. 교실 중앙 마지막 줄에 앉아서 다행히 같은 반이 된 순희와 앞의 다른 면 출신의 가연이와 이야기 중이었다.
오른쪽 복도 창가로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 애란이었다. 나는 그 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말끔한 새 자주색 교복 재킷을 입었다. 검은 긴 단발머리가 흑단처럼 찰랑했다. 까만 사각 뿔 테 렌즈 아래에서 맑은 눈이 껌뻑거렸다. 큰 입을 덮은 빨간 입술은 웃을 때마다 귀여운 덧니를 보였다가 가렸다.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이따금 수줍게 받아 웃는 애란에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 안이 궁금해 열고 싶은데 열쇠가 없어 열지 못해 요모조모 궤짝을 두드려보는 것처럼 같은 중학생 출신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도 그녀를 슬쩍 한번 보고, 그녀 목소리라고 짐작되는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고개를 금방 돌려 몇 번이고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