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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Oct 28. 2019

그녀들의 시간: 할머니, 어머니, 딸의 시간

영화 <82년생 김지영>(2019)


토요일 늦은 오후


토요일 늦은 오후 고민에 빠진다. 무언가를 해야 할 거 같다. 그런데 특별한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럴 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은 영화를 보는 일이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지만 토요일이라는 핑계로 극장에 간다. 이번 주 나의 영화는 <82년생 김지영>(2019)이다. 동명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만큼 영화 제목은 익숙하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 나는 이 영화를 볼까 말까 고민했다.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너무 뻔한(?) 내용의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평점란에 무수한 댓글과 별점 테러의 이유가 궁금해서라도 나는 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결심했다.



영화 초반 이야기는 충분히 예상가능하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까지 일하는 주부의 삶은 뻔하다. 게다가 시댁과 갈등이 새로울 게 있던가. 텔레비전 예능만 보더라도 고부갈등을 전시하는 프로그램이 있을 정도다. 시어머니 욕하면서 보는 그런 예능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이 영화가 갑자기 폭탄을 던진다. 멀쩡하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던 현모양처 김지영(정유미)에게 정신병이 갑자기 찾아온다. 어머니로 빙의돼 시어머니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보통의 여성의 삶을 사는 듯 하던 그녀에게 찾아온 불운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남편(공유)과 예쁜 딸을 지닌 주부이자 한 여성의 삶에 벌어진 그 사건이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정신병, 착취의 징후


특별한 일이라고는 전혀 일어나지 않을 그녀의 삶에서 왜 정신병이 발병한 걸까. 수많은 여성 차별, 불안, 그리고 심지어 공포를 전시하는 이 영화가 왜 하필이면 정신병이란 사건을 내세우는가. 멀쩡하던 그녀가 어머니의 입을 빌려 시어머니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어머니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을 특별한 사정이 있는가. 나는 그 이유를 처음에 찾을 수 없었다. 김지영의 그런 모습에 끙끙 앓으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남편의 모습은 우리네 모습일 것이다. 왜냐하면 병이 생길 이유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머니라는 사람이, 그리고 아내라는 사람이, 그런 몹쓸(?) 병에 걸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쉬쉬하고 숨기기 바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정한 문제는 이 사건이 단순히 돌발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 단서는 목소리들이다.



빙의된 목소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데 주목하자. 김지영의 어머니 목소리만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등장하던 그 음성은 어느 순간 할머니의 목소리로 모습을 바꾼다. 여기야말로 갑작스런 사건으로 치부해 버릴 일이 숨겨진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과거의 할머니의 시간과 어머니의 시간이, 현재의 김지영이라는 인물의 몸에서 동시에 재생되어 나오기 시작한다. 드디어 한 공간에서 무수한 과거의 ‘시간들'이 이미지와 사운드로 가시화될 때, 관객은 여성차별의 재생산의 구조를 생생하게 보게 된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벌어졌던 그 가부장적 착취 구조가 여전히 딸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안 사정상 오빠들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의 상처를 가슴 아파하던 할머니가 동시에 딸에게서 재생될 때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정신병이라는 사건이 발발했을 때 나의 감정은 공포였다. 저 병이 영원히 지속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소리들이 시간차를 두고 터져 나올 때, 나는 동명의 책과 영화의 평가 중에 주인공의 사정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댓글이 많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대를 거치며 나아질줄 믿었던 여성 차별이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녀들(!)은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삶에서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반응이었던 셈이다.



보호자 또는 가해자


우리들이 그저 예능 소재로 웃고 떠들고 넘어가는 그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지 영화는 경고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내가 어려서 몰랐거나 지나쳐버렸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그림자 폭력에 숨막혀했을 그 사람의 얼굴을 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정한 여성 차별의 원인은 가족 아니던가. 사회적 재생산의 기초적 단위인 그 가족이야말로 범죄의 원흉이다. 그 이름으로 많은 것이 용서되는데, 그 책임은 오로지 여성에게 전가된다. 적나라한 사례가 영화에 등장한다. 플래쉬백으로 기억되는 사건은, 학창 시절 벌어진 버스 안 추행 사건이다. 다행히도 버스에서 마주친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집 앞에서 마주친 아버지는 전후사정을 듣고서도(!) 딸을 나무란다. 네가 조신하게 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다그치면서 말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그 죄를 우리는 알고 있던가.



영화 끝무렵 김지영은 정신과 의사와 마주한다. 자신도 몰랐던 병을 인정하고 고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한 발 나아간다. 주인공이 “맘충”이라는 모욕적인 말에 항의하고 한때 잊었던 작가라는 꿈에 도전한다. 어찌됐든 나는 그 결말이 다행스러웠다. 설사 현실에서 그 병이 그렇게 쉽게 나아지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렇게 쉽게 해방구를 찾지 못할지라도 어쨌든 출구를 찾았으니까. 그러나 극장을 나오며 나는 이 영화에 활력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김지영이라는 인물은 여전히 외로운 섬처럼 남겨져 있었다. 카페에서 그녀가 항의할 때, 대다수 손님은 아이를 데려온 어머니들이었다. 왜 그녀들은 김지영처럼 항의하지 않았던가. 김지영의 정신병은 그저 징후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났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야, 단결하라!” 그녀들에게 주어를 바꿔 외치고 싶다. “만국의 여성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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