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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Oct 04. 2019

너의 가면을 벗어

영화 <조커>(2019)



조커의 웃음


영화의 오프닝 라디오 뉴스는 고담시의 청소 노동자 파업소식을 전한다. 노동자 파업으로 도시는 쓰레기로 넘쳐나고 쥐가 들끊는다.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가계의 폐업 홍보를 위해 화장대 앞에서 그는 정성스럽게 광대 분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아서의 광대짓과 그를 향한 집단 폭행.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퀀스에서 라디오 뉴스 속 쓰레기 너머로 돌아다니는 쥐의 이미지와 아서의 이미지가 교차된다. 쥐처럼 아서는 누군가에게 그저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아서를 향한 구타에 이유는 없었다. 광고판을 탈취하고 거리에서 폭행하는 이들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저 재미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주인공이 대항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웃음을 강박적으로 터트리는 것밖에 없다. 참지 못하는 웃음의 원인이 그의 병 때문인지, 세상을 향한 분노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 내내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것은 주인공의 저 웃음이었다. 아무리 통제해보려해도 제어되지 않는 웃음.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분출하는 웃음은 처음에 기괴하고 무서웠다. 그 웃음이 어린 시절 아서가 겪은 가정 폭력의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영화에서 소개함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왜 웃음만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을까? 그 표정과 소리만이 아서가 조커가 되기 전 그를 지키는 유일한 무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구타를 해도 그 누구도 아서의 웃음을 막지 못했다. 청소년들이 발길질을 해대도, 그리고 지하철에서 술에 취한 월가의 금융쟁이들이 발길질을 해대도 말이다. 폭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때리려면 더 때려봐라는 식으로 아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섭던 웃음소리가 나중에는 아서의 결기처럼 느껴졌다. 아서가 우연히 획득한 총을 소지하기 전까지 말이다.



대항폭력


궁지에 빠진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던가. 아서가 조커로 변신하는 순간은, 바로 총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시점이다. 만약에 주인공이 총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하철에서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아서에게 변화가 없었을 듯하다. 하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해 총성이 울리자 이제 아서는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다. 처음에 우연이겠지만 두번 세번 총성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자신의 본능대로 사람을 죽이고 거리를 미친듯이 아서는 뛴다. 조커의 드레이드 마크인 빨간 양복을 펄력이며 달려 나간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에서 어떤 해방을 느꼈다. 미친듯이 계단을 오르고 숨을 헐떡거리며 집으로 도망쳐 들어온 아서의 모습은 그 이전과 전혀 달랐다. 정신과 치료를 위해 약을 먹으며 억제하려던 본능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상인척 노력하던 모습을 벗어 던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아서의 처지가 이해되지만 지나치지 않나 반문할지 모른다. 그가 사람을 죽이면서 분노를 표출할 필요는 없었다고. 그러나 영화를 본 이라면 아서가 왜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듯하다. 아서는 조커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되어야 했다. 토마스 웨인(브레트 컬렌)을 유일한 구원자라 믿는 망상에 시달리는 어머니(프란시스 콘로이). 자신의 실수도 아닌데도 직장에서 해고되야하는 처지.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상황. 게다가 국가조차 치료의 기회를 박탈하는 현실. 이런 조건에서 아서의 폭주는 예정된 사건이었을지 모른다. 오히려 아서의 망상을 탓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결과에 불과하다. 아서의 망상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이 사회가 낳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영화의 처음 라디오 뉴스로 돌아가보자. 라디오 뉴스 속 쥐(새끼)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이 사회에서 기생하는 자라면 누구도 쥐새끼가 될 수 있다. 아서가 그렇고, 노동자가 그렇다. 그래서 성공한 사업가 토마스 웨인이 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하는 인터뷰는 고담시의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거창한 선언이다. 자신과 같은 자본가를 질투하는 무리를 깡그리 ‘병'이라고 낙인찍어 버린다. 그렇기에 도시의 소요 속에서 살해당한 토마스 웨인 부부는 그 헛소리에 대한 대가를 치른 듯 보였다. 이제 먼 훗날 배트맨이 될 부르스 웨인의 트라우마로 남았던 그 사건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한 범죄자의 개인적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착취에 견디지 못한 구조적 사건이었다는 사실말이다. 그러면서 기존 베트맨 시리즈에 그려졌던 조커의 이미지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조커와 배트맨의 관계는 항상 범죄자와 영웅의 구도로만 그려졌다. 그러나 이제 조커의 사연을 안다면 그렇게 판단할 수 있을까?



조커야말로 영웅 아닌가. 이 해석을 양보하더라도 배트맨이 영웅놀이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조커와 같은 악당이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조커와 배트맨. 이들이야말로 쌍둥이인 셈이다. 노동자의 아들이 조커라면, 자본가의 아들이 배트맨이다. 그렇게 보면 어떤 식으로든 자본에 균열을 내려는 조커는 이쪽 진영에서 보면 영웅이라고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을 가진 자라고 착각하는 어떤 이의 환상이다. 자신의 위치를 재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가진 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이는 얼마나 아둔한가.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우리편이 아니라 상대편을 위해 투쟁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조커의 살인을 목격하고 벌어지는 거리의 소요는 어떤 징후처럼 보였다. 모두 광대의 가면을 쓴 이들이 갑자기 단일한 집단의 형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리의 소요 한 가운데 자동차 위로 추켜 세워진 조커. 그리고 그의 특유의 웃음이 클로즈업된다. 그것은 이제 싸움이 시작됐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마지막에 조커는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하지만 곧 복도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진다. 달아나려는 자와 쫓아가는 자. 느린 음악과 함께 서서이 카메라는 뒤로 빠진다. 멀리서 보니 조커와 간호사의 모습이 놀이처럼 보인다. 끊임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조커와 어떤 식으로든 구속하려는 싸움이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 장면에서 어떤 구절 하나가 생각났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러나 명심하자. 우리는 누구도 비극적 삶에서 멀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조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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