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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Feb 13. 2020

정면을 바라보고 말하라

영화 <작은 아씨들>(2019)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서 기다리는 한 여성이 있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낯선 여인의 등만 보일 뿐이다.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던 찰나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영화 <작은 아씨들>(2017)은 마치집안의 차녀 조(시얼샤 로넌)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명한 소설가를 꿈꾸며 뉴욕에 상경한 조는 출판사를 들어서는 일조차 조심스럽다. 자신의 이름을 떳떳이 밝힐 만큼 자신있는 작품이 없는 탓이다. 그래서 출판사 대표에게 원고를 보여주고 계약을 할 때 가명을 사용한다. 거기에 더해 그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편집자의 이런저런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중요한 플롯의 삭제부터 주인공 여성의 결혼이라는 상투적인 결말까지 말이다. 생활비가 급한 그녀이기에 그런 조건은 입씨름의 대상이 아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 영화가 보여주고 말하고 싶은 주제는 뻔하다. 여성 배우에서 여성 감독까지. 처음부터 메시지가 그려지지 않은가. 



영화에서 그려지는 150년 전 미국사회의 여성이란 한마디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마치 집안을 돌봐주는 고모(메릴 스트립)은 틈나는 대로 이런 훈수를 둔다. ‘부유한 남성 만나 결혼하라.’ 그래서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이란 화두는 자매들의 일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주체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조까지도 힘든 처지에 낙담하여 로리(티모시 살라메)와 사랑을 잠시나마 갈구한다. 고착된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모습은 앞서 언급한 출판사 편집자의 요구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무조건 소설의 결론은 여성은 결혼하거나 죽는다는 요구를 내거는 것이다. 마치 그 대사가 햄릿의 대사마냥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처럼 들리지 않는가. 생존의 문제로 결혼이 치환되는 시대의 이야기는 오늘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점에서 영화 <작은 아씨들>은 영리한 선택을 한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관객의 대리인으로 4자매 중 조를 내세운다. 그래서 중심 플롯이 조의 이야기로 채워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 결정적 순간은 영화의 끝무렵 장면에서 등장한다. 



편집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하는 신이다. 마치 편집자를 앞에 세워두고 말하는 듯 하다. 영화 초반 자신감이 없어 머뭇거리던 그녀는 더 이상 없다. 자신의 요구를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조는 편집자 앞에 앉는다. 편집자는 소설 끝에 여성 주인공이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출판의 조건으로 변함없이 내건다. 게다가 터무니없는 가격에 판권을 넘기라는 요구를 한다. 그러나 조는 계약을 조율하며 여성 주인공이 결혼을 해야한다는 조건도, 그리고 판권을 넘기라는 조건도 거부한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오프닝에서 가명을 사용하던 작가는 이제 없다. 



영화의 마지막은 조의 책이 인쇄돼 나오는 장면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낱장의 원고가 아니라 한 권의 책으로 묶인다. 앞으로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엮을 미래의 그녀들에게 바치는 편지처럼 보인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하다. 여성영화라고 하기에 여성 연기자와 여성 감독으로는 부족하다. 적당한 시대극에 묻어간 여성 서사를 관객이 원하는 것일까. 싸우고 생채기나도 맞서 일어나는 ‘하나의’ 그녀가 아니라 ‘다수의’ 그녀들을 보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을까.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오며 허전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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