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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Mar 11. 2020

멕시코 어느 거리에서

영화 <로마>(2018)


 넷플릭스 시대의 영화


영화를 보는 일이 특별할 게 없는 시절에 영화 관람은 팝콘을 먹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상품을 소비하듯 개봉 영화에 집착하고 한 번 본 영화는 다시 찾지 않기 일수다. 게다가 영화를 반드시 극장에 가서 볼 일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가 대중화돼 노트북이며 스마트폰에서 언제 어디서든 영화를 볼 기회가 널려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좋은 영화 한 편을 즐기는 일은, 설령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그 가치가 바래지 않는다. 개봉이 지났다고 해서, 그리고 과거에 봤다고 하더라도 그 영화가 선사하는 새로운 인식과 감정이 샘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내가 선택한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on Orozco)의 영화 <로마>(2018)였다. 언젠가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쉽게 손이 안 갔던 영화였다. 수많은 영화상을 휩쓸었으니 그 작품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극장이 아니라 컴퓨터 스크린으로 봐야 하기에 그 시간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 선택은 옳았을까?



스크린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그 영화에서 각인된 이미지를 떠올려보곤 한다. 영화 <로마>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이미지는 좁은 주차장에 꾸역꾸역 집어 넣으려고 애썼던 자동차였다. 대형 자동차에 맞지 않게 비좁은 집 안 주차장으로 전진과 후진을 오가며 주차하던 그 자동차말이다.이혼을 결심한 뒤 술에 취해 소피아(마리나 테 라비라)는 차를 운전해 집에 돌아온다. 그런데 그 좁은 주차장에 집어넣으려고 애쓸 때마다 차는 여기저기 부딪혀 망가져 간다. 영화 초반 소피아의 가족은 완벽해 보인다. 사랑스런 자녀, 파코, 토뇨, 소피, 페페와 의사인 남편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서는 어떤 불행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초반에 이들 부르주아 가족의 일상은 주목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일상이 관심거리다. 고향을 떠나 멕시코의 부르주아 가정에 입주해 달라질 거 같지 않은 생활을 하는 그녀의 삶이 주목거리이다. 그러나 어떤 파도도 닥칠 거 같지 않던 클레오의 삶도 순탄치가 않다.



 탄생과 죽음


잠시 동안 연애를 하던 남자친구 페르민(조르지 안토니오 게레로)은 클레오의 임신 소식에 작별 인사 없이 사라진다. 멀리 떠난 그를 물어물어 애써 찾아가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한 절연이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붙잡고 출산일을 기다리는 클레오. 소피아의 배려 속에 클레오는 아이를 무사히 맞이할 거 같이 보였다. 그러나 인생은 마주치지 않을 듯한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1970년대 멕시코의 어느 거리는 군중의 온갖 함성으로 가득차 있다. 클레오가 소피아의 어머니와 가구점에서 갓난아이를 위한 침대를 구입하기 위해 방문하던 찰나 돌발적인 총성이 울린다. 이때 카메라는 실내에서 실외로 눈을 돌린다.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거리는 쫓고 쫓기는 살육장으로 탈바꿈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때 가구점으로 살려달라고 외치며 들어온 청년은 뒤찾아온 경찰에게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다. 그 장면을 목격한 클레오는 놀란 나머지 하혈을 하고 만다.



갑작스런 하혈로 찾은 병원은 시위 부상자로 아수라장이다. 수많은 사람의 외침을 뚫고 클레오는 출산을 한다. 그러나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기 전에 그 아이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원하지 않은 임신이었지만 죽은 아이를 가슴에 안고 오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학살당하던 그때 아이는 숨을 내쉬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죽음의 시퀀스에서 개인의 삶이 역사와 교차하며 마주하는 비극은 클레오 그녀만의 경험이 아니다. 아이를 사산하는 장면에서 거리의 시위도 처참하게 좌절됐으리라 예감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고통을 안고 현재까지 안고 살아가야 하기에 과거를 넘어 지금까지도 아픔이 지속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멕시코 낯선 거리의 학살 장면에서 오버랩되는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끄집어냈다면 우연이었을까.



 파도가 밀려와도


이야기의 끝무렵 여기저기 긁힌 자동차는 아담한 자동차로 바뀌어 있다. 소피아는 남편과 이혼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차를 고른다. 그리고 소피아와 아이들, 그리고 클레오는 해변으로 여행을 간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아이들은 여행의 마지막을 즐기려 해변에서 물장구를 친다. 소피아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난 뒤 클레오의 시선에서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갑작스런 불안이 밀려왔다. 아이들이 혹시라도 목숨을 잃는다면 어떻하지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허둥지둥 아이들을 찾으러 거친 파도로 뛰어드는 클레오. 잠시 뒤 집채 같은 파도 사이로 아이들이 하나둘 보인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정말 다행스럽게도 이들을 구조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변으로 나오는 클레오. 그때서야 클레오와 소피아에게 앞서 닥친 인생의 커다란 불행이 더 이상 커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지금  마주한 생의 행운이 더욱 고마웠다.



클레오와 소피아, 그리고 아이들은 해변가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거친 숨을 몰아쉰다. 영화의 포스터를 장식한 그 장면이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하나의 이미지로 스틸컷에 불과했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컥한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후보를 나는 감정적 연대라고 생각한다. 마치 한 몸인듯 서로를 껴안고 있는 장면에서 주인과 가정부라는 계급차이를 비롯해 그들 사이 어떤 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영화에서는 멕시코 부르주아지의 삶과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대조하는 이미지로 가득차 있다. 간간이 보이는 멕시코 사회의 모순을 이 영화는 전시하지만 강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클레오와 소피아, 그리고 아이들 사이 연대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예술의 가치


앞선 장면에서 예술로서 영화의 가치를 떠올렸다.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연의 합목적성을 따르는 판단력의 역할을 논의한다. 판단력은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 덕분에 도덕 감정의 감수성을 촉진시킨다. 이중에서도 미감적 판단력의 대상이 바로 예술이다. 영화 <로마>의 저 시퀀스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바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인했다. 나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불시에 떠나보낸 기억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알 수 없는 기분탓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멕시코 어느 거리를 클레오와 함께 걷고 있는 듯 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도 카메라의 패닝을 따라 움직이는 클레오 주변의 사람들이 보이는 듯 하다. 고통 속에 희망을, 그리고 희망 속에 고통을 느끼는 운동 속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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