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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ug 22. 2019

탈출구는 있다, 그러나

영화 <엑시트>(2019)


대중영화와 비평


대중영화야말로 진정한 비평의 대상이다. 누군가는 영화 앞을 수식하는 이 ‘대중’을 싫어하거나 심지어 혐오하여 대중영화를 폄하할지 모른다. 대중의 어원에서 알 수 있듯, 이것은 그저 덩어리로 취급되어 몰개성, 몰취미를 종종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영화'라고 지칭되는 영화만이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오해되기도 한다. 텍스트의 형식과 내용이 지니는 숙련만이 관심이 되버린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을 만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읽지 않는 양서가 의미 없듯 영화 또한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관객과 접점이야말로 영화의 진정한 의미가 형성되고 있다고 봐야 하며 그 과정에서 관객은 현실에서 또 다른 실천을 준비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중영화는 어떤 문화 상품보다도 의미의 교섭이 벌어지는 장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그래서 유행하는 대중영화는 평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해 영화의 유행을 보며 지금 우리 사회를 엿볼 수 있다고 믿는다.



올해 여름 한국영화의 승자는 관객수에 알 수 있듯 <엑시트>(2019)이다. 글을 쓰는 현재 관객수는 800만에 가깝다(영화진흥위원회 KOFIC 2019.08.21 기준 누적관객수 7,836,304명이다). 영화 흥행 끝 무렵이기는 하지만 무난히 800만은 달성하지 않을까 싶다. 제작사나 배우는 1,000만을 기원하겠지만, 이 정도 관객수가 이 영화가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치일 듯하다. 한창 이 영화가 입소문을 본격적으로 내기 전 나는 이 영화를 한여름 주말 밤 관람했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관객과 같이 보는 관람환경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영화를 즐겼다(!) ‘즐겼다’는 표현에서 보이듯 길지 않은 러닝시간(103분) 동안 키득키득 웃으며 유쾌하게 시간을 보냈다. 코미디영화라는 장르에서 풍기는 웃음에 전염돼 별 거 아닌 장면에서 웃었던 것이다. 여름 극장가의 단골 장르는 코미디라기 보다는 호러물인데, 장르의 대중성상 호러물은 대중적 유행을 선도하지 못하는 듯하다. 올 여름은 일본과 껄끄러운 과거사문제 때문에 일본발 애니메이션도 개봉을 미루고 있었다. 이 틈을 영화 <엑시트>가 영리하게 파고들어 성과를 내고 있다.



배우 조정석의 얼굴


<엑시트>를 한여름밤 피서처로 선택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정말로 ‘무난한’ 영화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실패하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골랐다고 봐야 한다.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 중 어느 것도 끌리지 않은 상황에서 진지한 드라마를 선택하기 보다는 가볍게 웃자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주연배우 조정식을 향한 믿음도 평소 잘 보지 않는 코미디 장르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이 배우를 처음 기억하는 영화는 <건축학개론>(2012)이다. 주인공 승민(이재훈)에게 현란한 키스 장면을 설명하는 납뜩이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기에(?) 조연을 잊지 못하는 영화였다. 이처럼 조정석이라는 배우는 코미디 장르를 정말 잘 소화하는 연기자다. 그뿐이랴. 꾸준히 정극에도 출연하고 최근에는 SBS  드라마 <녹두꽃>(2019)에서 백아강 역을 맡아 열연했다. 장르불문 어떤 역할이라도 잘 소화하니 조정석이라는 세 글자 때문이더라도 영화를 기대했다. 조성석의 얼굴에서 나는 송강호의 얼굴을 떠올린다. 송강호는 장르불문, 웃음과 슬픔을 오가는 페이소스의 소유자다. 그 후계자로 나는 조성석을 떠올린다. 연기의 스펙트럼이나 그 얼굴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오프닝을 여는 장면은 굉장히(?) 비장하면서 웃음을 자아냈다. 대학교에서 산악동아리로 단련된 용남(조정석)이 초크가루를 손에 묻혀 도전하는 종목은 철봉 운동이다. 그 진지함과 가벼움의 모순 때문에 이 영화는 오프닝 때부터 웃음을 유발한다. 대단한 것을 도전하는 거 같은데 동네 놀이터에서 철봉으로 기계체조 흉내(?)를 내고 있다. 그 어색함이 재미를 유발한다. 대학교를 졸업한지 시간이 흘렀음에도 번번이 취업에서 실패하는 주인공이 쉬지 않고 준비하는 일과가 운동이다. 대부분 취업 준비생과 다르게 공부를 특별히 하지 않고 체력 단련을 한다(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라 그런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막내 누나 정현(김지영)는 이런 동생의 취미가 못마땅하다. 보물처럼 꼭꼭 숨겨둔 카라비너를 들추며 취업에도 도움이 안 되는 대학 때 산악부 활동을 왜 했냐고 타박하기 일수다. 여기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필요없다고 외쳐대는 그 기술 덕분에 주인공은 가족을 구하고 끝에서는 사랑 또한 쟁취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필요에 의해 재단하는 사회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재난 상황에서 별 볼일 없는 기술이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존기술이 모든 것이 구비됐다고 믿는 도시 한복판에서 요구된다.



폐쇄공포증의 도시


액면상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도시인데 특색이 없다. 그 도시가 서울이건, 뉴욕이건, 런던이건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공간과 결부된 시간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엑시트>에서 중요한 것은 사방이 뚫려 있지만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폐쇄공포증을 불러오는 상황 그 자체다. 이 말은 진정한 시공간적 배경, 즉 크로노토프로 제시된 배경이 ‘재난’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재난을 불러온 원인이 사람이라는 데 주목해보기로 하자. 영화에서 모순은 이 재난과 사람 사이 벌어진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인재 대 사람이 대립한다. 테러가 불러온 공포를 피하기 위해 우왕좌왕하고 피하는 데서 이 영화는 동력을 얻는다. 그런데 이 모순을 해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다. 재난을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자연이다. 비가 내리며 연기가 쓸려 내려가며 한밤 소동은 끝나간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테러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고 그 해결도 관심거리가 아니다. 이 공포를 어떻게 주인공이 해쳐 나가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주인공 장수의 사정은 어떤가.



장수는 취업준비생이다. 취업준비생이 한 둘이랴. 만성적인 취업난은 흔한 소식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위기가 일상인 사회다. 위기가 일상인 사회에서 평범한 것 가지고는 사건을 발생시킬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테러야말로 우연적 사건이면서 돌발적 사건으로 위기를 가져온다. 민방위 훈련에서 봄짓한 독가스 테러가 일어나야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진정한 생존기술이 밝혀진다는 점이다. 그렇게 구박받던 주인공의 산악동아리활동 경험이 위기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설정인가. 주인공의 아버지 장수(박인환)가 입버릇처럼 자신의 아들 장수에게 내뱉는 말이 있다.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유녀독남인 장수가 다칠까봐 걱정돼 하는 소리겠지만, 테러현장에서 탈출하는 그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 말을 해댄다(어쩌라고?). 하지만 아들은 개의치 않고 무엇이라도 해 위기를 벗어난다. 영화 내내 나는 아버지의 저 말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뭐라도 해봐!”라는 소리도 들렸다. 생각해보면 장수는 취업이 안 되는 그 시절에도 무엇이라도 하고 있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의 구박이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어린 조카까지 무시할 정도였다.



영화 주인공 장수는 영화 제목처럼 이야기 끝에서 탈출한다. 백수에게도 출구는 있다! 그 출구를 만드는 이는 겉보기에 주인공의 지식과 기술처럼 보인다. 생존하기 위해 개인은 몸부림쳐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야기에서 재난을 처리하기 위해 중심이 돼야 할 국가는 있지만 모든 이를 구조하기에는 무력하다. 재난현장을 바쁘게 오고가는 구조헬기에서 그 노력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자기 계발의 논리를 설파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장수와 의주(윤아)의 마지막 탈출 장면을 기억해보기로 하자. 수많은 불빛으로 점멸하는 드론의 도움으로 이들은 건물을 옮겨 다니고 자신들의 위치를 구조헬기에 전하는 게 가능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주인공은 해피엔딩을 맞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개인에게 뭐라도 해보라고, 그리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프로파간다를 전파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변을 둘러 보라고 말한다. 당신 곁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그리고 익명의 손길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그 일을 위해서 말이다. 불가능한 임무를 가능한 임무로 바꾸는 계기는 바로 사회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끝에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외침이 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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