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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Mar 19. 2020

죽음에서 탄생으로 운동

Black Swan Art Film, BTS


경계를 넘다


유튜브에서 공개와 동시에 수천만의 조회수와 수백만의 좋아요, 그리고 수십만의 댓글 등이 달리는 뮤직비디오라면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해당 가수의 팬덤의 이유와 함께 그 인기의 동력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케이팝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는 지금 BTS는 아마도 유행의 중심에 서 있을 것이다(‘방탄소년단’이라는 한글 이름 보다 오히려 ‘BTS’가 더 익숙한 이유도 이 그룹의 세계적 명성에서 기인한다). 올해 2월 이들은 <Map of the Soul: 7>의 정규앨범으로 돌아왔다. 앨범이 출시되기 전부터 다양한 티저로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특히 이들 뮤직비디오 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끈 작품은 슬로베니아의 현대무용단 DM Company와 협업한 <Black Swan> 이었다. 무엇보다 BTS가 지향하는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다양한 캠페인에 동참한 이력이 있는 BTS는 최근에 <Connect, BTS> 라는 캠페인에서 세계 곳곳의 예술가와 협업을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이 무용단과 작업 또한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뮤직비디오는 BTS 노래의 메시지 확장을 직접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많은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 내고 더 나아가 이들 예술 장르의 관심을 이끌고 있다 (유튜브에서는 DM Company와 마샤 그레이엄(Martha Graham) 관련 무용 영상을 보고 남긴 댓글을 읽다보면 자신을 BTS 팬이라고 소개한 글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BTS의 창작자로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예술의 전통적 정의를 유용한 대상을 생산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청각적 ∙ 시각적 등  감각 형식 아래 쾌락을 선사하는 생산품이라고 규정한다면, BTS의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이 정의에 부합할 듯 하다. 한마디로 BTS는 오늘날의 예술가이다.



본격적으로 DM Company와 협업한 <Black Swan>의 뮤직비디오로 들아가보자. 이 뮤직비디오는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Art Film”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예술 영화’일 것이다. 솔직히 어떤 영화를 ‘예술 영화’와 ‘대중 영화’라는 경계 아래 가두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이들 사이 선을 긋는 일은 임의적일 뿐이다. 그런 구분은 관념론적 예술관의 흔적에 불과하다. 주목해야 할 점은 작품과 관객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의 양상이다. 관객의 폭발적인 호응에서 이미 이 뮤직비디오는 어떤 의미를 형성하고 효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그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있다.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게임 등은 이미 영화적 담론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 오래이다.




페르소나, 그림자, 에고


<Black Swan>은 하나의 진술로 시작한다. 이 진술을 문장 그대로 옮겨 보자. 뮤직비디오를 해석하는 중요한 키워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용가이자 안무가 마사 그레이엄에서 인용한 말이다. “댄서는 두 번 죽는다 - 춤추는 것을 멈출 때 한번, 그리고 이 첫 죽음은 더욱 고통스럽다.(a dancer dies twice - once when they stop dancing, and this first death is the more painful.)” 강조된 문구에서 보이듯 두 가지 키워드가 보인다. 하나는 ‘춤’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그런데 이 춤은 단순한 명사로서 춤(dance)이 아니다. 그것은 동사로서 춤(dancing)이라는 데 주목하자. 춤이야말로 운동 아니던가. 이 운동이 멈출 때 죽음이 찾아온다. 춤을 전업으로 삼는 이에게 춤의 끝은 죽음과 같다. 그만큼 춤꾼에게 고통스럽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단순히 무로서 돌아가는 죽음에 불과할까?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이번 앨범의 기획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앨범의 기획은 크게 세 가지 키워드로 소개된다. 페르소나(persona), 그림자(shadow), 에고(ego)이다. 나는 이 키워드를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용어를 가져와 대응시켜 살펴보고 싶다. 이들은 각자 초자아(superego), 이드(id), 에고(ego)에 짝지워진다. 현실원칙인 초자아와, 쾌락원칙인 이드, 그리고 자아인 에고가 그 주인공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이란 리비도란 에너지의 저장고로 이 세 요소의 구성체인 셈이다. 그런데 평소 우리는 사회적 규범이라 할 수 있는 현실원칙 초자아에 ‘지나치게’ 억압돼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사회적 규범에 따라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쓰고 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볼 때 문명의 원천은 인간의 본능을 억제해 승화(sublimation)시킨 결과이다. 이 현실원칙인 초자아는 쾌락원칙인 이드를 통제한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과잉억압이 문제이다. 사회를 이루기 위해 억압이 요구되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다. 과유불급이 항상 문제 아니던가. 이 과잉억압은 이드에 그림자를 길게 남긴다. 그 결과 에고는 분열돼 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로 말이다.



인간은 저 세 요소가 조화로울 때 건강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한 쪽이 강조돼 신경증과 같은 병에 시달리고 만다. 우리 내면의 현실원칙은 항상 외친다. “안돼!” 이들은 사회적 규범, 도덕, 법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중요한 현실은 우리의 욕망이 항상 그 지배에 마냥 수긍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아니오”라고 외치며 저항한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가면을 벗어 던지고 그림자가 뛰쳐 나온다. 그렇기에 지배와 저항의 싸움에서 발생하는 운동이 생겨난다. 욕망은 운동인 셈이다. 프로이트의 용어대로 하자면 욕망이란 번역보다 ‘충동(drive)’이란 번역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때 뮤직비디오의 앞을 장식하는 마샤 그레이엄의 문구가 이해가 된다. 춤이 끝날 때 운동이 끝나고 어떤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죽음은 하나의 죽음에 불과하다. 새로운 탄생을 예견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Black Swan>의 뮤직비디오에서 죽음에서 탄생으로 전화의 지점은 해방의 순간이다.



죽음에서 탄생으로


<Black Swan>의 뮤직비디오는 크게 3 막으로 구성돼 있다. 이 막의 구성을 살펴보면 2층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1층으로 공간이 변해간다. 이 공간의 변화에 따라 시간이 변하고 사건이 발생한다. 뮤직비디오의 서사는 페르소나를 벗어 던지고 에고가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앞선 프로이트의 용어대로 말하자면, 초자아의 억압에서 벗어나 에고가 이드를 의식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1 막을 보라. 7명의 무용수가 차례대로 입장한다. 이때 이들 무용수를 주목해보자. 검은 복장의 6명의 무용수를 따르는 상의를 탈의한 1명의 무용수. 마지막 상의를 탈의한 무용수가 바로 검은 백조(Black Swan)이다. 평소에는 이것은 페르소나의 그림자로서 현실원칙을 잘 따른다. 그러나 원칙을 준수한다는 의미는 질서를 뜻하지만 그 이면은 억압을 의미한다. 1막의 이미지는 온통 검은 백조가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주변의 알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들이다. 그 중의 백미는 바로 빛의 감옥이다. 이 감옥에서 검은 백조가 벗어나려 몸부림 칠 때 마다 주변의 백조들이 잡아 끈다. 탈출하려는 욕망과 가두려는 욕망 사이의 투쟁이 잘 들어나는 시퀀스다. 여기서 이들 사이 싸움은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운동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욕망은 정지사진으로 포착하기에 부족하지 않는가. 주변의 여건에 따라 욕망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현실원칙을 따르다가도 어느 순간 쾌락원칙을 따르기도 한다. 그렇기에 검은 백조의 탈출은 예정된 수순일지 모른다.



2 막에서 드디어 검은 백조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다리를 건넌다. 과거 자신을 괴롭히던 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에스컬레이터를 터벅터벅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함도 잠시, 클로즈업으로 확대되는 발걸음. 이제 3 막이다. 그리고 검은 백조를 애워싸는 하얀 백조의 무리들. 그런데 이 싸움의 양상이 달라졌다. 흰 백조의 무리가 둘러싸지만 검은 백조는 이들을 뿌리친다. 하나의 규범이 다가오고 다른 원칙이 접근해도 이 백조는 이제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전세가 역전이 됐다. 검은 백조의 율동에 맞춰 흰 백조의 군무가 따른다. 흰 백조를 따르던 검은 백조의 모습은 없다. 롱 숏으로 흰 백조 사이에서 날개를 펼치는 검은 백조가 비춰진다. 다시 카메라는 미디엄 숏으로 이들을 찍는다. 검은 백조의 날개짓에 맞춰 카메라는 서서이 올라간다.



끝으로 BTS의 뮤직비디오와 수많은 리액션 비디오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있었다. 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세계의 팬들은 무엇에 끌렸던 것일까? 무엇이 이들 사이에서 공통감을 이끌어냈을까? 그 원인을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서만 찾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BTS는 어떤 보편성에 호소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을 하나의 세대, 인종, 젠더 , 지역 등 정체성에 기대 설명할 수는 없다. 팬덤에는 이들을 가로지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나는 가설을 세워 본다. <Black Swan>에서처럼 억압에 대한 저항, 그 끊임없는 운동이 공통감이 원천 아닐까. 그래서 BTS의 다음 운동이 기다려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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