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 시즌 2
전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19로 신음하는 지금 좀비 영화는 현실을 스크린에서 온몸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장르다. 이 장르의 연원은 1929년 씨브룩(William B. Seabrook)의 아이티 기행문 <마술의 섬>(Magic Island)에서 시작한다. 그 이후 최초의 좀비 영화 <화이트 좀비(White Zombie))(1932)>를 거쳐 조지 로메로(George A. Romero)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Night of the Living Dead)>에 이르러 식인과 전염의 특성을 지닌 오늘날 좀비 영화로 탄생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좀비 영화의 유행은 2000년대 이후 비디오 게임을 원작으로 한 <레지던트 이블(Resident Evil)>(2002)과 좀비의 속도를 배가시킨 <28일 후(28 Days Later)>(2002)일 듯 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좀비영화는 천만영화 <부산행>(2015) 이전만 하더라도 크게 환영받지 못한 장르였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창궐과 함께 좀비는 다시 살아 귀환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넷플릭스의 <킹덤>이 있다.
시즌 1에 이어 시즌 2에서도 산 자와 죽은 자의 혈투가 계속된다. 동래에서 시작된 역병이 식인으로 인해 돌염변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질풍같이 상주까지 쳐들어온다. 이 전투는 고립무원의 상주성에서 벌어진다. 문경새재로 퇴로가 가로막힌 채 봉쇄된 성에서 사느냐 죽느냐 갈림길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세자 이창(주지훈)과 대립각을 세우는 조학주(류승룡)의 권력이 발휘되는 방식이다. 그의 권력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둠으로써 발휘된다. 보통 우리는 권력이란 통치자의 적극적인 행위로 실현된다고 사유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이다. 오히려 버림받은 자들을 죽게 내버려두는 소극적인 행위로써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그런 점에서 <킹덤>은 지금 현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신천지를 중심으로 발원한 대구 ∙ 경북의 비상사태를 우리는 봉쇄가 아니라 적극적인 구제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학주는 백성을 죽게 내버려 둠으로써 권력을 차지하려 하지만, 이에 반해 세자 이창은 백성을 살림으로써 권력을 되찾으려 한다. 그런 점에서 <킹덤>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권력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창궐하는 이 즈음 병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권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가령, 유럽에서는 손쓸 사이도 없이 노인들이 요양원에 방치된 채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아이스링크에 시신을 보관해야 할 정도이다. 그리고 수많은 확진 환자를 치료할 여력이 없어 전국민의 다수가 감염돼야 이 병이 종식될 거라며 적극적인 조치를 회피하는 국가들도 있다. 그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일상을 어느 정도 영위하면서 점염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는 살리기 위해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나 생명을 살리는 권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까이는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어떤 권력은 수많은 생명을 죽게 내버려 뒀다.
다시 <킹덤>으로 돌아가 보자.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권력의 본성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미지에서도 전시된다. 권력을 쟁취하려는 두 주인공의 서사가 한 축이라면, 좀비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또 다른 한 축이다. <킹덤>의 죽은 자의 이미지는 좀비 영화의 전형적인 식인과 감염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킹덤>의 좀비의 이미지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 전란 이후 피폐한 삶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시즌 1을 기억해보면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고 어머니가 딸을 해치는 등 현실규칙을 뒤엎는 극단의 좀비가 등장한다. 거기에 인륜이나 도덕 따위는 없다. 오로지 굶주림에 지쳐 탐식하는 괴물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시즌 2에서는 좀비가 밤이 아니라 낮에도 활동하면서 산 자에게 여유를 주지 않아 그 공포가 배가된다. 이때 <킹덤>을 지배하는 공포는 좀비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결부된 개걸스러움이다. 진정한 공포는 이 괴물의 탐욕스러움이다. 그리고 그 욕심의 끝이 바로 권력이다. 그래서 조학주의 권력욕이 딸 계비 조씨의 배신으로 끝나고, 계비 조씨의 권력욕이 결국에 좀비로 바뀌며 끝나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보인다. 오로지 쾌락원칙만 지배되는 괴물이야말로 권력의 쌍둥이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세자 이창은 마지막에 자신의 권력을 포기한다. 이런 선택을 가져온 동력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나중에는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싸운 경험 때문 아닐까. 자신의 호위무사 김무명(김상호)과 스승이었던 안현 대감(허준호)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리고 서비(배두나)와 영신(김성규) 등의 조력을 거쳐 싸워온 결과 때문이라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공통감이 형성되고 있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에 왕족, 양반, 천민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피는 붉다.’ 이러한 연대감이 생명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고 세자의 인식 전환을 도모했을 것이다.
<킹덤>을 보면서 나는 뉴스에서 지금의 역병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떠올렸다. 자발적으로 대구로 달려가는 의료진과 마스크와 돈을 기부하는 시민들의 모습 등에서는 이타적인 연대의 모습을, 그러나 자가격리를 준수해야 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이기적인 모습을 본다. 어느 모습이 지금 여기 우리의 모습일까. 내가 보기에 둘 다 우리의 자화상이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은 각자도생의 길이 아니라, 다 함께 가는 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염은 탐욕을 먹고 사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