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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pr 06. 2020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영화 <버드 박스>(2018)


재난과 인간


전염병의 창궐은 모든 일상을 가로막는다. 주말에 극장을 가는 일도 꺼려지니 말이다. 게다가 요즘 극장에 가봤자 개봉작도 딱히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주말 집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자연스런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이런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데 한몫 거든 미디어가 넷플릭스다. 지난 주말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버드 박스>(2018)였다. 무엇을 볼까 고민하다 작년 차트의 맨위를 차지한 영화라는 사실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우연은 무섭다. 영화의 설정이 전염병이 번져가고 있는 혼돈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 전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19가 무섭도록 기승을 버리고 있는 시절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그 전염병의 원인이 초자연적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재난의 원인이 무엇이건 중요하지 않다.



재앙이 야기하는 결과가 관심거리다. 미래가 불확실하니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자살을 유도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눈을 가려야 한다는 영화의 설정은 재난의 불확실성을 보여준다. 이때 카메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헝겊으로 눈을 가린 채 이동하는 인물의 시선으로 비춰준다. 시점숏으로 보여지는 이 장면은, 특히 주인공 맬러리(산드라 블록)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헝겊 사이로 미세하게 비치는 햇빛으로 묘사된다.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어둠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답답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도 모른 채 시각을 제외한 감각에 의존해 이동해야 해서 그렇다. 그 결과 <버드 박스>가 주는 지배적인 감정은 불안이다. 전망의 부재로 말미암아 앞으로 전개될 사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정보의 부재에 더해 미친 자들이 정신병동을 나와 활개치기 때문에 영화에서는 불안을 넘어 공포가 더해진다. 어디서 그들이 나타나 해코지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재난이 닥쳐 정상이 비정상으로, 그리고 비정상이 정상으로 탈바꿈하는 이유는 세계가 카오스라는 이유 말고는 없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대상은 이런 카오스에서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자화상이다. 진정한 불안은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는 데서 온다. 곤경에 빠진 이웃을 구해주려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선의는 종종 악의로 돌아와 선한 이의 목숨을 앗아가버린다. 그래서 비상사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존본능만을 최우선으로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집단자살의 원인인 그것을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은 이유도 이해할 만하다. <버드 박스>가 초점을 두고 이야기하고 보여주려는 대상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비규환 속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출구를 어디서 찾고 있을까?



출구는 어디에


전염병이 출현하고 6년이 지나도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무전기로 전달된 한가닥 희망에 의지해 맬러리와 아이들은 여정을 떠난다. 이들은 거친 강물을 헤치고 나간다. 그것도 눈을 가린 채 말이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 마지막에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협곡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안대를 벗고 길을 안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안전을 담보로 누군가를 희생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영화는 묻는다. 멜러리에게 그리고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유일한 어른 맬러리가 안대를 벗고 조타수 역할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강안에 도착한 이후 아이들를 인도해야할 유일한 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과 올림피아(다니엘 맥도날드)의 딸 가운데 골라야 한다. 선택의 딜레마는 이렇다.



이런 한계상황은 인간에게 여유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 또는 저것의 양자택일 선택지만 보일 뿐이다. 이것과 저것의 양립가능한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어 보인다. 그래서 카오스의 세계에서는 이기적 인간만이 올바른 전형으로 영화 초반 비쳐진다. 그런데 이 영화는 탈출구로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모두 살 길을 택한다. 설령 무모한 길일지라도 말이다. 그 선택의 근거는 무엇인가? 굳이 찾자면 희망외에는 없다. 이 선택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은 주인공 산드라 블록의 연기다. 초자연적인 사건의 개연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주인공의 연기 때문이었다. 불안과 공포, 번민과 결단 등을 표현하는 노련한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그렇게 관객을 흡입하지 못했을 듯 하다.



주인공 일행은 마지막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다.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정원에서야 멜라니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붙인다. ‘보이’, ‘걸‘이 아니라 ‘톰’과 ‘올림피아’이라는 이름을. 내일을 알지 못하기에 이름조차 붙이기 주저했던 멜러리는 이야기 끝에서야 아이들을 통해 희망을 체감했다. 세상이 절망스럽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꿈을 꿔야 한다. 미래를 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서 역병이 도는 지금 공원을 뛰어다니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괜히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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