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냥의 시간>(2020)
내가 지금까지 본 윤성현 감독의 작품은 <파수꾼>(2010)이 다이다(감독의 필모그래프를 찾아보면 <바나나 쉐이크>(2010), <시선 너머>(2010) 등이 보이지만 감독의 이름 석자를 각인한 작품은 <파수꾼>이다). 전작 <파수꾼>이 10년 전 영화이니 그의 후속작 <사냥의 시간>(2020)은 굉장히 늦은 감이 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흔히들 강산도 변한다고 말하는 기간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넷플릭스와 계약 과정에서 매끄럽지 않은 사정 때문에 <사냥의 시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노이즈 마케팅이 돼 화제거리였다. 이런 우연곡절 끝에 지난 주 영화가 개봉됐다. 개봉 당일 서둘러 이 작품을 본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하나의 이유만 선택하자면 영화 <파수꾼> 개봉 당시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가장 컸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는 주인공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이들 목소리가 누구의 소유인지 그리고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질 무렵 스크린의 화면이 열리고 편의점에서 담배값을 누가 낼까 아웅다웅하는 두 친구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이 보인다. 곧이어 계산을 마친 이들은 편의점 출입문을 나선다. 이 지점에서 시퀀스의 촬영에 주목해보자. 카메라는 두 친구를 계속 쫓아가는데 편의점을 나서자마자 길 건너편 웅장한 건물을 위아래로 훑어 보여준다. 여기서 관객은 영화의 시간이 지금이 아니라 근미래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도시 건물은 SF 장르에서 볼 법한 건축물이다. 그리고 차를 타고 움직이는 주인공들의 수다 사이로 비치는 거리의 모습 또한 지금 여기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아니다. 그 거리는 미국의 도시 뒷골목을 연상하는 폐허의 거리이다.
<사냥의 시간>은 초반 이야기가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을 비추는 데 상당한 장면을 할애한다. 카메라가 열심히 거리를 비추면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의 대화 속에 이들이 사는 시공간이 설명된다. 경제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탓에 화폐의 가치는 형편 없어진지 오래이고 실업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주인공들은 특별한 직업도 없이 차를 몰면서 거리를 헤맨다. 디스토피아의 세계, 이 시공간이 주인공들이 사는 세상이다. 갱단이 출현하는 도시의 정경은 이들 세상 자체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한판 벌이는 범죄는 개연성을 가진다. 잃을 게 없고 달라질 게 없는 이들에게 남겨진 선택지가 뭐라 말인가. 이 곳을 탈출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구라면 무엇이든 꿈꾸는 것이다. 그 시작은 준석(이제훈)의 출감과 함께 발동을 건다.
몇 년 전 금은방 강도 사건을 벌여 감옥에 수감되었던 준석은 세 친구 장호, 기훈, 그리고 상수(박정민)에게 대담한 제안을 한다. 감옥에서 경험은 도박장을 털 계획을 실행한 수단을 제공한다. 사람들을 위협할 총기를 구할 방법이며, 이후 탈출할 장소까지 갈 수단 등까지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도박장을 털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도박 자체가 불법이라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범죄를 갱단이 법에 의지해 처벌할 수 없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봉식(조성하)의 말따라 “정말 무서운 것은 법 밖이다.” 법이라는 질서가 보호해주는 경계를 벗어나면 어느 것이나 허용되기에 약자를 보호해줄 장치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친구들의 계획과 실행은 애당초 파국으로 향해 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행동의 대가는 무자비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폭력은 목숨을 담보로 요구한다.
이야기 후반은 도박장을 턴 이 세 친구를 쫓는 한(박해수)의 등장으로 공포 영화에 가깝다. 거대한 적에 대항해 싸울 힘이 이 친구들에게는 없다. 그저 서서이 다가오는 한의 총부리에 이들은 무방비로 노출될 뿐이다. 하루만 견디면 준석은 자신이 꿈에 그리던 타이완으로 떠날 수 있지만 시간은 이제 그의 편이 아니다. 경찰의 통신망을 이용해 이들의 동선을 쉽게 따라오는 한 때문에 이들은 어떤 도피로도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제목 마냥 사냥의 시간이 이어지고 영화는 그 공포를 전달하는 인물을 보여주는데 힘을 쏟는다. 이런 점에서 출연자들의 연기는 나무랄 데가 없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공포를 이들 연기자는 온몸을 써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영화를 끌고 가는 서사가 빈약할 때 오는 결과를 관객은 쉽게 감당하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지나치게 감정만을 표현한다. 대표적인 장치가 환상신이다.
한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부터 준석은 알 수 없는 불안 탓에 꿈을 꾼다. 꿈이야말로 대표적으로 환상을 보여주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의 내면이 조심스럽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몇 장면을 기억해보자. 안개 속을 헤메는 준석 앞에 상수는 피눈물을 흘리며 나타난다. 그리고 타이완 시골 마을에서 준석은 한에게 여전히 쫓긴다. 이런 환상신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이 없이 좋은 장치이다. 그러나 누누이 강조하지만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한 서사가 없다면 이런 장치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그 답변의 단서를 감독의 전작 <파수꾼>에서 찾고 싶다. <사냥의 시간>의 인물들은 감독의 전작 인물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파수꾼>의 배우가 상당수 <사냥의 시간>의 배우와 겹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파수꾼>의 주인공들이 중고등학교의 청소년들이었다면, 영화 <사냥의 시간>의 주인공들은 20대에 접어든 청춘들이다. 마치 <파수꾼>의 주인공들이 자라서 마주한 시간이 <사냥의 시간>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관심거리는 이들이 자라서 마주한 세상의 모습이 아니다. 어른이 되서 경험한 세계가 그들이 바라는 세상이란 보장은 없다.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였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듯 싶다. 내 질문은 ‘왜 이들은 어른이 되지 못했는가?’이다. 이들 주인공은 현실에서 싸우기 보다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다. 그나마 영화 끝에 준석은 싸우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면조차 나는 주인공의 환상이 아닐까 의심했다.
어떤 영화는 흥행하고 어떤 영화는 참패한다. 대중 영화의 숙명은 관객의 지지에 달려 있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사냥의 시간>의 리뷰를 찾아보던 중 나의 눈에 띄는 100자평이 있었다. 평가를 그대로 옮기자면 “나의 시간을 사냥당했다.” 영화를 바라보는 평가는 다양하기 마련이다. 관객이 서있는 위치에서 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면 충분하다. 그럼에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는 듯 싶다. 관객의 시간과 접속하지 못하는 영화의 시간은 외면당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감독의 시간이 여전히 10년 전 <파수꾼>의 시간에 갇힌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든다. 세상은 변하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나 감정은 그대로이니 말이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인식의 부족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