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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May 21. 2020

즐거운 나의 집

<건축 탐구, 집>, EBS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


몇 년 사이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텔레비전이 아니라 컴퓨터로 시청하는 습관으로 바뀐 지 오래다. 해당 채널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유튜브에서 거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고 로그인 할 필요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습관이 들어버렸다. 요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EBS <건축 탐구, 집>(이하 <집>)이다.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어느날부터 추천 영상으로 올라가 클릭한 이후 빠짐없이 시청하는 애청자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우리에게 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곤 한다. 어느 순간부터 집은 상품가치에만 초점이 맞춰져 버린 지 오래기 때문이다. 재테크의 대명사가 아파트 아니던가. 어느 지역 어느 아파트가 얼마나 올랐는지는 중요한 뉴스거리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집은 잠시 거주하는 공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세태에 <집>은 과감히 질문을 던진다. ‘집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프로그램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방송에서 선보이는 집은 일단 아파트가 아니다. 오로지 개인 주택만이 탐구의 대상이다.



혹시라도 한번도 보지 않은 이라면 이 방송이 화려한 외관의 집을 전시하는 프로그램이 아닐까 오해할지 모른다. 부의 상징으로 집이 나오리라 상상한다면 착각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넓지 않아도 사연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집>의 가장 큰 매력은 “건축 탐구”라는 수식어에 맞지 않게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이 프로그램의 수식어를 “건축 탐구”가 아니라 “사람 탐구”라고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에 자리 잡고 있건 그들의 사연이 중요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나도 한번쯤 원하는 집에 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곳에는 사람이 산다


생각해보면 개인 주택에 살아본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유년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로 누군가의 집에서 세들어 사는 신세로 쭉 살아와서 그렇다. 보통은 아파트와 같은 다세대 주택이었다. 지금이라고 현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혼자 사는 처지인데다 굳이 개인 주택에 살아야 할 동기도 특별히 없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어떤 집에 살고 싶니?’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어린 시절 기억을 꺼내 본 뒤 마당 넓은 집에 살고 싶다고 말하겠다. 층간 소음 걱정 없이 개 한마리 키우면서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랬다. 아버지가 한쪽에서는 나무를 심고 우리 집 강아지 ‘똘똘이’는 마당을 부지런히 왔다갔다하면서 개구멍을 파거나 그러다 고양이를 쫓아다니며 놀았다. 언제나 집을 생각하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의 향처럼 나는 이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그런 평화가 영원할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은 빠르다. 지금은 기억의 잔상으로만 남아버렸다.



과거에는 집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언제나 시간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하면 나는 언제나 좋았던 그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의 표정을 집과 함께 떠올린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은 다 떠나고 나는 홀로 남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동생들은 다 결혼을 했다. 내가 <집>의 애청자가 된 이유는 그 공간 그 시간, 그리고 그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 집의 주인은 대개 가족과 함께 등장한다(아주 드물게 홀로 출연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일까.



즐거운 나의 집


<집>을 볼 때마다 나는 딱히 건축의 기술적 특성에 흥미가 없다. 보통은 건축가들이 등장해 집의 구조 등을 조심스럽게 품평하지만 언제나 사족과 같이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이 있다. 대개 집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묘하게 닮았다. 특히 집을 직접 지은 출연자가 등장하는 회차를 보면 그 주인의 성격에 따라 집은 그만의 개성을 뽑낸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나는 집주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심지어 미래까지 보는 듯한 착각을 하곤 한다.



앞으로 나는 어떤 집을 짓고 살고 싶을까? 현재는 이미지만으로 위로받는 처지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집을 짓고 싶다. 집을 지어본 누군가는 그 건축 과정이 너무 지난해 다시는 해보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지만 말이다. 설령 그렇더라도 그 과정을 경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다. 그 이유를 굳이 들자면 그 과정조차도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해서다. 술술 풀리는 여행이 무슨 재미일까. 사건이 없는 이야기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래서 오늘 나는 미래의 집을 상상속에서나마 그려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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