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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ug 18. 2020

종말의 끝, 무엇이 남았나?

<데빌맨: 크라이 베이비>(2018)


어떤 기대


우리는 이야기가 끝에 이르러 어떤 평형에 도달하기를 기대한다. 인물 사이 갈등과 문제가 끝에서는 해결되길 원하는 것이다. 게다가 보통 그 끝이 주인공의 의지대로 마무리되기를 바란다. 인물이 온갖 어려움을 해치고 결국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이 그런 종결의 예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야기가 독자나 관객의 예상과 어긋나게 되면 오히려 결말의 잔상은 오래 남게 된다. 이런 점에서 지난 주말밤 나의 시간을 책임졌던 <데빌맨: 크라이베이비>(2018)(이하 <데빌맨>)은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이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나도 모르게 ‘이게 뭐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어서다. 더불어 그 결말을 몰고가는 작품의 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보통은 관객과 적당한 타협을 하기 마련인데 이 애니메이션은 그런 기대를 비웃기다라도 하듯 결론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데빌맨>의 플롯을 요약하자면 악마 인간(?)으로 탄생한 주인공이 악마와 싸우는 이야기다. 정말 단순하지 않은가? 주인공 아키라는 우연한 기회에 악마에 빙의된다. 그런데 악마의 조종을 따르는 대신 아키라는 악마를 조종하는 힘을 갖게 된다. 여기서 데빌맨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이 나온다. 인간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경계의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다. 유독 아키라가 왜 그렇게 된 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플래시백으로 전달되는 아키라의 어린 시절 모습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어릴 때부터 주인공은 사소한 사건에도 쉽게 울음을 터트리는 연약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아키라의 눈물은 그가 악마에 빙의된 후에도 인간성, 정확히게 말하자면 선한 본성을 잃지 않는 동력이 된 듯 보인다. 여기까지 보면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오히려 애니메이션 초반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이미지다.



파국의 서사


애니메이션 내내 폭력적이면서 선정적인 이미지가 펼쳐진다. 인간의 육체는 산산이 찢겨지고 바닥은 피로 넘쳐난다. 게다가 여성의 몸은 성적 대상화되기 일수이다. 여성의 육체가 강조되고 과하게 노출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적이면서 선정적인 이미지가 나열되는 애니메이션이 바로 <데빌맨>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누군가에게 혐오감을 불러올지 모른다. 요즘처럼 미투와 같은 젠더 이슈에 민감한 시기에는 말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던 이런 이미지에서도 리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음악까지 더해지면 살육의 장면이 축제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표현이 자극적이기는 하나 예상 못할 장면은 아니다. 이미지의 감각 그대로 즐기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문제는 이 작품의 결말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표면상 인간의 선의지를 ‘깡그리’ 부셔버린다. 인간과 악마의 싸움에서 시작해 데빌맨과 악마의 싸움으로 이어지는 전투에서 관객이라면 데빌맨의 승리를 점치게 된다. 좋건 싫건 그렇게 끝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이 작품은 그런 기대를 저버린다. 선의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결론은 사탄이 이끄는 악마의 승리로 끝난다! 원작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그런 결말은 당황스러울 정도이다. 아키라의 반쯤 잘린 시체 옆에서 사탄의 독백이 흘러나올 때 나는 물음표를 자신도 모르게 던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파국으로 끝나야 했나?’ 사탄은 부활해 악마를 이끌고 싸워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갔다. 이게 결말이다. 늦게나마 신이 사탄을 징벌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선과 악 사이


이 작품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딴지를 건다.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가? 인간인가 악마인가? 인간의 입장에서 악마가 악하지만, 악마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악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데빌맨이라는 존재 자체도 기존 이분법적 도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과 악마의 경계에 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마의 형상을 지녔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지닌 존재들이 바로 데빌맨이다. 여기에 재미난 포인트가 있다. 누구나 데빌맨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악마에게 사로잡혀 모든 것이 흡수되기 때문이다. 아키라처럼 선의지가 강한 인간만이 악의 유혹과 폭력을 견디고 나서 데밀맨으로 탄생할 뿐이다. 이런 데빌맨만이 지구 종말 순간까지 사탄과 악마에 대항해 싸움을 벌인다. 설령 그 전투가 헛된 싸움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점에서 <데빌맨>은 인간의 선의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작품이다. 설령 세상이 종말로 끝날지라도 말이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뒤에 선의지를 향한 운동이 이 작품 속에는 숨겨져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계주의 시퀀스일 것이다. 미키는 이어달리기에서 계주봉을 다음 주자에게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계주봉이 전달되려는 순간 그 장면은 반복된다. 이때 미키의 의지는 무엇일까? 그녀의 의지는 데빌맨의 빰을 타고 흐르던 눈물처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던 운동이다. 그것은 연민, 공감, 동감 등 감정으로 표현되는 선의지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한 장면 때문에더라도 <데빌맨>은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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