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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ug 29. 2019

그 남자 그 여자

 영화<유열의 음악앨범>(2019)


친숙한 시간


어떤 장르 영화는 유독 흥미를 끌지 못하는데, 그 중 하나가 내게는 멜로영화인 듯하다. ‘장르의 관습’이라고 할 만한 암묵적 규칙이 있는데 멜로 장르는 유독 뻔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이제 사랑이라는 주제가 나이가 들면서 시큰둥하게 된 까닭도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유열의 음악앨범>(2019)을, 그것도 개봉날 조조시간에 보러 갔을까?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 중에서 시간적 배경을 소개하는 문장 한 줄이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94년을 시작으로 2005년까지 두 남녀의 만남을 다룬다. 극 중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혜인)은 20살이 되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10여년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들처럼 나 또한 그 시간대 청춘을 거쳐왔다. 알 수 없는 우연에 이끌려 나는 극장에 갔다.



영화에 등장하는 중요 시간은 1994년, 1997년, 2005년이다. 이야기의 1994년 가을은 얼마나 특별한 해였던가. 특별한 사건이 있다면, 그 해 가을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유열의 음악앨범’ 방송이 첫방송을 시작한 계절이다. 그 시간을 겪지 않았다면 ‘유열’이라는 이름조차 낯선 이름이다. 그러나 그 날은 남자 주인공 현우에게는 특별한 순간이다. 소년원을 막 나온 현우가 간절히 바라는 기적(?)이 벌어진 날이기 때문이다. 방송의 오프닝을 열면서 진행자 유열은 방송, 사랑, 비행기의 공통점을 묻는다. 엠씨의 답변은 이들은 처음 시작할 때 에너지가 매우 크게 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앞으로 현우와 미수의 사랑이 출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한다. 과거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현우에게 예기치 못한 방송은 어떤 계시처럼 들렸던 듯하다. 그렇게 동감내기 미수와 현우의 만남은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지점이 있다. 가족 없는 대학생 미수와 소속 없는 현우의 자리가 그 정체다.



불안정한 자리


나는 유독 캐릭터들의 자리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미수와 현우 주변에는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로 가족이 없는 것인지, 이야기 전개 때문에 가족을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인지 몰라도 가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단독자로서 개인, 미수와 현우만 보일 뿐이다. 그나마 미수에게는 유사가족(?)이라고 할 만한 은자(김국희)가 있다. 그녀는 미수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빵집에 십대시절 일하러 와 미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미수와 같이 빵집을 운영한다. 시간이 흘러도 미수와 은자는 자매처럼 서로의 일상을 챙긴다. 그런데 문제는 현우이다. 영화의 초반 왜 소년원에 갔는지, 그리고 왜 과거의 기억에서 도망치려고 하는지 들려주지 않는다. 미수도 고아와 다를 바 없지만 현우는 홀로 벌판에 나와 있는 모양세다. 자신의 얘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세상의 풍파를 견디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두 남녀의 중요한 관계인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측면만 본다면 현우와 미수는 묘하게 공통점이 있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와 비교할 만한 영화를 하나 떠올렸다. 바로 영화 <건축한 개론>(2012)이다.



우연하게도 두 영화 모두 비슷한 시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1990년대 중반을 그 기점으로 출발한다는 점이다. 가장 크게 다른 특징이 있다면 주인공의 배경이다. <건축학 개론>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은 대학 신입생이라는 공통 요소가 있다. 교양 수업을 매개로 이들은 만나고 친해진다. 물론 사소한 오해로 헤어지고 훌쩍 시간이 흘러 재회하며 화해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유열의 음악앨범>을 기억해보면 미수와 현우는 같은 시간을 사는 청춘이라는 사실 외에 그 접점이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의 만남은 정말로 우연이다. 그 날 현우가 미수의 빵가게 앞을 지나간 것 자체가 그렇다. 둘의 배경을 살펴보면 미수는 대학생이고, 현우는 소속이 없다(나중에 현우는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진학한다). 다시 둘의 공통점을 찾자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외에도 모두 안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는 이 두 인물이 서로를 애타게 원하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의 불안정한 모습에서 나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렸다. 특히, 1997년이라는 시간을 기억해냈다. 그 해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그 파급이 어떨지 상상하지 못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한국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부자되세요.”라는 광고문구에서 보이듯 시장의 논리가 사회의 논리로 자리잡았다. 자기계발의 수련이 요구됐고 도전보다는 안정이 최고의 가치로 부각되던 시기였다. 사회적 관계의 파산 때문에 단독자로서 개인이 모든 것을 자율이라는 미명 아래 헤쳐나가도록 강요했던 시대였다. 현우와 미수의 모습에서 그 시간이 떠올랐다. 돌봐줄 이 없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급박한 처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가족의 부재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배경 아닐까. 주인공 현우처럼 어떤 사고로 사회에서 밀려나면 더 이상 재진입할 기회조차 상실하는 그런 시대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유독 현우의 이야기가 비중을 차지한다.



과거의 남자와 미래의 여자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두 주인공은 동등한 비중을 차지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동력은 남자 주인공 현우에게서 온다. 이야기의 긴장을 유발하고 사건을 끌고 가는 동력은 현우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고 때문에 망가진(?) 자신의 삶을 복구하려 현우는 노력하나 모든 것이 쉽지 않다. 잊을 만하면 그 시절 친구들이 찾아와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그 때문에 현우는 미수에게 다가갈 기회를 잃어비리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현우는 과거에 갇혀 있다. 이에 반해 미수는 안정된 직장을 찾는 등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현재를 살고자 노력한다. 국문학이라는 전공을 살려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보다 작은 연봉이더라도 안정된 직장을 얻는 삶을 선택한다. 그리고 현우를 만나며 결혼을 꿈꾸고 미래를 계획하고 싶어한다. 10여년을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영화 속 우연은 ‘솔직히’ 너무 작위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연한 만남 때문에 오히려 영화를 보며 설레고 미래를 꿈꾸게 된다. 적어도 과거보다는 나은 내일, 그리고 홀로 사는 삶이 아니라 같이 사는 삶을 희망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끝은 모두가 예측가능하다. 그런데 정말로 두 주인공의 만남은 우연이었을까? 나는 영화의 끝에서 이 질문이 떠올랐다. 처음에 둘의 인연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현우가 다음 날 군대를 간다는 설정도 우연이었다(너무 우연이 많은 거 아닌가. 재미있게도 극 중 미수는 현우와 만남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 우연이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뒤 벌어진 사건을 떠올려 보면 모든 사건이 그렇지 않았다. 미수가 현우에게 만들어준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기 위해서 현우는 미수의 과거 집으로 일부러 이사를 간다. 현관 비밀번호가 메일 비밀번호라는 사실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한편, 현우의 과거를 대면하기 위해 미수는 현우의 친구였던 피해자의 누이를 찾아간다. 이 둘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있었다. 서로와 함께 하고 싶은 기회를 놓치기 싫어서, 현우는 미수를 향해 뛰어가고, 미수도 현우를 향해 달려간다. 영화의 끝은 너무 뻔할지 몰라도 나는 영화에서 어떤 자유를 본다. 선택할 자유, 행복할 자유 말이다. 반복되는 재생산의 이 구조를 끊는 계기 말이다. 현우의 과거는 지속되겠지만 미수와 함께라면 새로운 미래 또한 계속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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