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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Sep 05. 2019

기억이라는 유령

영화 <그것, 두 번째 이야기>(2019)


괴물의 귀환


영화 <그것> 시리즈를 생각하면 가장 인상깊은 이미지는 “그것”이라 불리는 페니와이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섬뜩한 표정에서 이 영화는 공포영화구나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영화 <그것: 두 번째 이야기>(2019)(이하 영화 <그것2>)를 보러 가기 전 떠오른 캐릭터도 주인공 ‘루저’ 7인방이 아니라 ‘페니와이즈’다. 이 기괴한 캐릭터가 어떻게 귀환해 공포를 선사하고 사라질까, 이것이 가장 궁금했다. 공포영화라는 장르는 그렇게 생각하면 결말이 거의 정해진 셈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괴물은 종국에 사라지게 돼있다. 영원히든 아니든 간에. 그래서 매력적인 캐릭터만큼 공포 영화를 견인하는 장치는 없는 듯하다. 누구나 아는 시리즈인 경우 공포의 대상인 그 캐릭터가 얼마나 유혹적이냐에 따라, 적어도 한 번 볼까라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다. 그런데 공포 영화 캐릭터의 매력만이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는 아니다.



우연히 나는 <그것2>의 전작, <그것>을 본 적이 있다. 대명사 제목을 붙인 제목에 이끌려 도대체 저게 뭐야하는 호기심 때문에, 잠 이루지 못하는 어느 날 밤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던 이 영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에 흠뻑 빠졌던 이유는 기괴한 캐릭터에만 있지 않았다. 아이들과 괴물이 대립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라는 궁금증이 더 컸다. 명확한 갈등 구조와 그것이 이끄는 긴장이 무엇보다도 흥미를 유발했다. 기억해보면 나는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굳이 공포라는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다. 더운 여름 무더위를 날리는데 극장만큼 좋은 장소가 없고 공포영화만큼 오싹한 기분을 선사하는 영화가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의 귀환에 흥분돼(?) 극장을 찾았다. ‘공포’라는 부정적 정서보다도 ‘호기심’이라는 긍정적 정서를 억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작의 흥행과 함께 ‘왜’ 그것이 다시 등장했을까라는 궁금증이 더해져서 말이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모든 것이 망각되고 왜곡되고 '심지어' 사라져 버린다. 우리네 인생사에서 기억은 중요하지만 스냅사진처럼 모든 것을 생생이 기억한다면 그거야말로 저주일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잊혀졌다고 믿었던 기억이 떠오른다면 어떤 기분일까. 추억이라 부르는 기억이라면야 상관없다. 그런데 '정말로' 잊기 위해서 노력하던 기억이라면? 영화에서 27년 후 어느날 그것이 갑작스럽게 돌아온다. 이유가 있던가. 27년이라는 시간적 주기외에 다른 정보는 없다. 영화의 오프닝은 축제의 한 가운데 유원지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하는 웃음소리와 연인들의 사랑스런 눈빛이 오가는 장소다. 모두 다 즐거운 기억을 쌓기 바쁜 그곳에 그것이 출현한다. 특유의 거친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보인다. 강에서 기어올린 사람의 심장을 물어 뜯는 장면에서, 스크린 속 인물과 관객 모두 깜짝 놀란다. 그리고 다음 신에서 빨강 풍선이 축제의 서막을 알리듯 뭉개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공포의 정체


영화에서 친구를 불러모으는 이는 마이크(이사야 무스타파)이다. 그런데 그만이 과거의 사건을 온전히 기억한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메인주 데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고 있다. 어린 시절 그 시간에 속박돼 떠나지 못한다.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거처를 마련하고 그것의 역사를 강박처럼 쫓고 있다. 이와 달리 다른 친구들은 모두 데리를 떠났다. 각자의 영역에서 작가, 사업가, 건축가, 애널리스트, 배우 등으로 성공적 경력을 지니고 산다. 그런데 27년 전 맹세를 상기시키며 돌아오라는 다급한 친구의 목소리에 이 친구들은 꺼림직하지만 속속 과거의 그 동네로 돌아온다.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서약을 기억해서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불러온 공포와 함께 어떤 의지 때문에 돌아온다. 수십년 동안 악몽에 시달리고, ‘그것’이라는 말만 들어도 오한이 나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공포의 원천일까?



공포 영화에서는 항상 공포의 대상이 등장한다. 영화 <그것2>도 마찬가지다. "그것"이라 불리는 페니와이즈가 공포의 겉모습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이 오랜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직면하는 공포는 더 근원적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그 원초적 공포를 따라간다. 당장이라도 앞에 나타나 이들을 덮칠 것 같은 그것은 왠지 뜸을 들인다. 왜냐하면 이들 주인공의 기억 속에 망각된 기억을 되살려 진정한 공포를 선사하기 위해서다. 근원적 공포는 “루저”라 불리던 이들이 대면하고 싶지 않던 어린 시절 기억이다. 이 영화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의 외관이 선사하는 공포 때문이 아니다. 얼마든지 그런 공포는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자신 속에 내재된 공포는 그렇지 못한다. 잊고 있다가도 불쑥 등장해 괴롭힌다. 그것을 최종적으로 처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 얼간이들은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던 그 공포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



주인공들의 어린시절 공포의 원천을 살펴보자. 빌(제임스 맥어보이)은 어린시절 죽은 동생의 사건에 죄책감을 앓고 살아간다. 놀자고 보채는 동생을 외면하고 나가지 않은 날 하필하면 사고가 발생한다. 시커먼 배수구에서 동생의 목소리는 들려오고 그를 잡아끈다. 베벌리(제스카 차스테인)는 어머니의 죽음을 탓하는 아버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죽음이 그녀의 책임이 아니건만 그녀만을 탓하는 아버지의 유령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벤(제이 라이언)은 어린 시절 뚱뚱하다고 놀림받은 기억과 실연의 상처 때문에 괴롭다. 그때 그 시절과 전혀 다른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면서 성공적인 건축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에디(제임스 렌슨)는 어머니탓에 결벽증에 시달리고 그 시절 훈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이크는 화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지만 마약중독자였던 부모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따라다닌다. 한마디로 이들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주인공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은 “루저클럽”은 어린시절 소외된 이들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교차하는 영화의 중반부는 주인공들이 망각의 정체를 확인하는 과정이면서 관객이 이들의 공포의 기원을 목격하는 여정이다. 그래서 영화 <그것2>은 상당 시간을 주인공들의 과거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할애한다. 어쩌면 그것, 페니와이즈의 서사는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 어디에서 왔고, 왜 그런지 무슨 상관이랴. 그래서 마이크가 전하는 그것의 기원의 이야기와 처단 방법은 부수적으로 보인다. 주인공들이 망각하던 것을 기억해내지 않는다면, 그리고 두려움을 용기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어떤 방법도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말미 그것의 처단은 이미 결정된 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왜 괴물이 페니와이즈라는 고유명 대신 그것이라는 대명사로 불리는지 이해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진정한 정체가 각자가 지닌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외부의 괴물, 그것, 페니와이즈는 자신의 기억 속 괴물의 투사체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괴물보다도 내면 속 괴물을 없애야 한다.  



기억이라는 유령


그것을 처단하기 전 벌이는 의식 속에서 이들은 각자의 물품을 함께 태운다. 바로 그 물건들이 자신들이 만든 기억 속 괴물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태우는 대상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인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물건 속 기억에는 나쁜 것만 놓여 있지 않다. 망각하고 싶은 기억 옆에는 잊고 싶지 않은 기억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첫 사랑의 기억과 같은 시구처럼. 그래서 그것을 최종적으로 처단할 때 동원되는 힘은 어린 시절 기억을 모두 가져가겠다는 결단에서 온다. 마지막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괴물의 크기는 작아지며 인형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람들을 위협하고 심지어 작아 먹기도 했던 괴물은 망상이었나? 현실에서 끊임없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실체가 없는 존재일리 없다. 그것은 주인공들의 기억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공포를 유발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환상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없다고 하기도 그런 존재처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이다. 좋지 못하다고 해서 잊으려 노력한다고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의식은 영원하고, 따라서 트라우마도 영원하다. 진정한 치유는 의식의 수면으로 나쁜 기억을 떠올리고 정면으로 쳐다볼 용기에서 온다. 설령, 그것이 유령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극장을 나오며 영화 <그것2>이 공포영화로 보이기 보다 아이가 어른이 되가는 성장영화처럼 보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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