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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Sep 15. 2019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

<힘을 내요, 미스터리>(2019)


바보의 등장


바보가 하나 있다. 동생과 국수집을 같이 운영하면서도 손님에게 밀가루는 건강에 좋지 않으니 먹지 말라고 호통치는 바보다.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2019)(이하 <미스터 리>)는 이 바보 철수(차승원)를 전면에 내세운다. 동네 미용실에서 한 뽀글머리를 과시(?)하며 운동으로 단련된 알통을 연거푸 자랑해대는 바보다. 코미디영화에서 등장하는 바보는 이 장르에 참으로 적합한 캐릭터다. 현실과 부딪히며 웃음을 유발하며 이면에서는 그 세상을 조소한다. 바보야말로 부조리한 현실에서 웃음의 유발자인 셈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바보 철수는 주변과 부조화하나 그렇다고 오로지 모순을 지적하고 웃음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밀가루 음식이 몸에 좋지 않다고 손님을 타박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코미디 장르에서 자신의 필모그래프를 확실하게 쌓아온 배우 차승원이 연기한 바보 철수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의 초반 바보 철수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출생의 비밀을 지닌 주인공처럼 갑작스러운 과거사가 드러나는 캐릭터다. 어느 날 문득 장모(김혜옥)가 찾아와 철수 딸을 위한 골수이식이 필요하다며 강제로 그를 납치한다. 수년간 연락을 끊은 장모의 방문은 막장 드라마에 등장할 법한 사건이다. 영화 사이 사이 병원의 로비에서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막장 드라마는 주인공의 드라마처럼 보인다. 갑자기 등장한 딸 샛별(엄채형) 앞에서 철수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의례 가져야 할 당혹감 등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딸을 데면데면 쳐다보고, 딸 역시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를 심드렁하게 바라본다. 관객이 아는 사실은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부녀가 오랜 시간 떨어져 지냈다는 점뿐이다.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이들은 갑자기 ‘조우’한다. 이제 영화는 이 막장 드라마의 사연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관객에게 들려주고 보여줄지가 문제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해결의 시작은 샛별이 병원에서 같이 오랫동안 투병한 친구에게 선물을 선사하러 대구로 가출을 감행하면서 벌어진다. 엉뚱하게 딸의 가출에 동참하게 된 아빠는 졸지에 보호자 아닌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된다. 아버지이니 형식상 보호자지만, 바보이니 실제로는 피보호자인 셈이다. 조화스럽지 못한 이 현실이 유발하는 웃음이 대구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동네 양아치에게 강탈당한 딸의 돈을 되찾기 위해 쫓아간 대구 중앙로 지하철 입구에서 철수는 알 수 없는 공포에 멈춰 서고 만다. 코미디영화의 외피를 뒤집어 쓴 이 영화에서 사연의 비밀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 지점부터 웃고 떠들고 끝날 줄 알았던 영화가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장르가 코미디라고 해서 내용까지 가벼우리라는 법은 없지만, 영화 <미스터 리>는 위험한 시도를 한다. 추석 대목을 맞이해 개봉돼 신나게 웃고 끝날 줄 알았던 이야기가 수면 아래 잠긴 심각한 사연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2003년 2월 18일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스크린 이미지 하단에 선명하게 표시된 이 날짜는 철수와 샛별의 인생을 바꾼 날이다. 시커먼 공백으로 남겨진 사건의 정체가 밝혀지는 시간이다. 관객에게 15년 정도가 흘러서 이 사건을 기억해내는 영화의 속내를 솔직히 모르겠다. 수백명의 사망자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 지금 ‘왜’ 스크린에서 부활돼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존자와 유족은 그 사건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리라 예상되기에 섣부른 스크린 작업이 가져올 상처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 그날 시커먼 화재 현장과 아우성이 본격적으로 재현되고 나자 이 영화는 가벼운 코미디영화의 외피를 벗어 던진다. 차승원이라는 배우의 코믹한 캐릭터가 유발하던 웃음이 더 이상 경쾌하지 않은 순간이다.



오래된 상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등장시켜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하여 처음에 이 폼 저 폼 잡던 영화는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날의 이야기가 드러나자 더 이상 관객은 편안하게 영화를 주시하지 못했을 듯하다. 영화를 보기 전 얼핏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배경이, 수많은 사상자를 낸 참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막상 스크린으로 재현되자 웃고 떠들 기분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그 사고 때문에 고통받았을, 그리고 현재까지도 아파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렇다. 실제의 재난을 극화하는 화면을 주시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상영 내내 그 고통이 떠올랐다. 실제 사고를 극화했다는 점에서 영화 <미스터 리>의 주인공 철수와 샛별, 이 부녀가 사고 이후 지니고 살아왔던 상처는 우연이 아니다.



영화 <미스터 리>의 주인공 철수는 바보로 등장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사고 때문에 누구보다 성실했던 소방관 철수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자신조차 평생 그 상처를 온 몸에 안고 살아가야 했다. 샛별 또한 어머니 뱃속에서 겪어야 했던 사고 때문에 건강하지 못하고 병을 앓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자 비로소 철수와 샛별의 처지가 이해되면서 부녀를 갈라놓게 만들었던 사연이 더 이상 막장 드라마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이제  출생의 비밀 따위는 없다! 이 부녀에게 벌어진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말하며 우연이라고 치부할 사고는 누구나에게 벌어질 법한 사건이었다. 재난이라는 게 자신에게 벌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그 사고를 타인의 불행이라고 치부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고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그 사건은 더 이상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그들 삶을 흔든다. 그럼에도 이들은 살아가야 한다.



갑작스런 가출 소동은 끝나고 영화는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 엔딩은 완벽한 판타지가 아니다. 노천 카페에서 멋있게 커피를 마시며 딸의 하교를 기다리는 철수는 여전히 지적 장애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야기의 처음과 달라진 사실이 있다면, 이제 그는 그냥 바보가 아니라 ‘딸 바보’라는 사실이다. 샛별 또한 병이 완치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또래 평범한 아이처럼 아버지와 투닥투닥거린다. 다만, 원경에서 비치는 부녀의 뒷모습은 평범한 아빠와 딸처럼 보인다. 그 장면을 보면서 사회적 재난에 지금도 고통받고 있을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문자 메시지로 남았을 피해자의 목소리 때문에 고통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픈 이들 말이다. 트라우마는 평생 지속되겠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그들 또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기를 극장을 나오며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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