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철원기행>(2014)
가족이 모였다. 아버지(문창길)의 정년퇴임식장에. 행사가 끝나고 어색하게 사진을 찍는다. 아버지의 표정은 기쁘기보다 떨떠름해 보인다. 그런데도 장남(김민혁)과 며느리(이상희)는 축하드린다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중국집에서 식사를 한다. 그래도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보통 식사를 하고 속이 차면 분위기도 좋아지건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 <철원기행>(2014)은 처음부터 가족 사이 어색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그런데 이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이혼 선언! 어머니(이영란)의 반발은 예상가능하다. 여기서 관객은 당황스럽다. 아버지의 그 선언 때문이 아니라, 속 시원히 그 이유를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계속 그 이유를 묻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관객은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견뎌야 한다. 이제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 갈까.
영화 <철원기행>은 시작부터 폭탄을 던진다. 나는 “폭탄”이라는 말 이외에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갈등은 어떻게 해결될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은 하나였다. 이 갈등이 가져올 파국과 결말이 궁금했다. 그러나 끝까지 영화는 속 시원히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불친절하고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주시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다. 이들 가족의 모습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네 가족은 화목하기 보다 다들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명절에나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모이지 않았가. 이런 유사성 때문에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스크린을 주시하게 된다.
이들 가족 사이에 퍼져있는 어색한 분위기는, 그들이 떨어진 시간과 거리만큼 깊다. 아버지는 철원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두 아들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사는 곳도 다르고, 그래서 그 이름은 낯선 이름이다. 그런데 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겨울에 내린 눈 때문에 차편이 끊겨 이틀을 아버지의 사택에서 같이 지내게 되는 것이다. 가족 사이를 며느리만 동분서주한다. 아버지의 분위기를 맞추고, 어머니의 눈치를 보고, 시동생을 타이르고, 남편을 다독인다. 그런데 그 행동이 단순히 며느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며느리뿐만 아니라,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그런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각자가 어떤 꿍꿍이가 있어서 모인 것이다. 큰 아들 내외는 가계를 위한 임대료가 필요하고, 둘째 아들은 결혼을 위한 돈이 필요하다. 자신들의 사정을 호소하고 돈을 타낼 궁리를 하기 위해 모였다.
처음에 아버지가 던진 폭탄에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 갈등이 드러나지만,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가족 사이의 갈등이 고개를 든다. 이 영화의 재미는 이것이다. 표면의 갈등뿐만 아니라 아래의 갈등이 서서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들은 싸운다. 아버지가 이혼 선언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은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오히려 그 갈등을 애써 숨길 여력이 없어졌을 뿐이다. 산발적으로 드러나는 이들 사이 대립을 보면 이 에너지가 어떻게 분출될지가 궁금했다. 기상 악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이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 한시라도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니 계속 압력이 증가한다. 그리고 터진다. 그 출발은 이혼을 선언한 아버지와 어미니 사이에서 시작해 형제 사이에서,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서, 아버지와 그의 지인들 사이에서 터져 버린다.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영화는 모순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면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감정을 폭발하는 시퀀스다. 어머니는 며느리와 함께 찾은 식당에서, 무심코 입에 댄 뜨거운 국물과 짠 음식에 화를 낸다. 남편의 갑작스런 이혼 선언이 구질구질한 지역 철원탓이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외진 이 동네가 아니었다면 그들 사이 관계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닿지는 않았을 듯이 말이다. 아버지도 비슷하다. 학교 후배와 지인이 마련한 송별회에서 술자리 끝에서는 화를 낸다. 후배의 만류에도,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마침내’ 역정을 낸다. 이 장면에서 나는 내심 안도가 됐다. 영화 내내 자신의 감정을 속 시원히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무엇도 말하지 않는 아버지가 드디어 폭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을 돌아가기 위해서 우연히 마주친 가족의 모습에서 결국에 같은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모습을 확인한다.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끝에서 반전을 보여준다. 마지막 하루를 지내야 하는 그 날 밤, 하필이면 그 밤에 보일러가 고장난다. 엄동설한에 유일한 난방기구 열풍기가 있는 방에 가족이 잠을 깨고 모인다. 한쪽에 술 취한 아버지는 잠을 자고, 시어머니부터 아들과 며느리는 쪼그려 밤을 지세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하는 카메라의 시선에 비친 쪼그려 앉은 이들 가족의 모습에서 관객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미 주인공들의 감정은 폭발했지만, 아직도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듯이. 그리고 변함없이 아침이 찾아 온다. 아버지의 해장국에 모처럼 가족은 다같이 모여 식사를 한다. 그리고 지난 밤의 열기를 잊고 기념으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처음보다는 어색하지 않은 사진을, 그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가족들은 각자 거처로 돌아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쓸쓸하다. 그래도 가족은 다른 날에 또 모일 거다. 설사 사진 한 장으로 남을지라도. 우리네 가족은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그러지 않은가. 영화 <철원기행>은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 내내 나는 우리 가족을 생각했다. 사진 한 장도 제대로 안 남은 우리 가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