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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18. 2015

오늘도 아웅다웅

덜 큰 딸과 철부지 엄마 

7시 반에 화장실에 가려고 눈을 뜨면 그걸로 늦잠은 끝이다. 다시 잠들고 싶은 시간은 애매하게도 9시 반 경인데 그쯤 되면 교회 갈 준비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잠들 수가 없다. 그래서 7시 반에 눈을 뜨면 바로 생각한다. '오늘도 설교시간에 졸겠구나.'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나름 규칙적인 시간차를 두고 세끼를 먹는데 오늘의 아침은 9시 반으로 계획했지만 예상 밖의 기상시간 때문에 8시부터 부엌에서 소란을 피우게 됐다.


어제 먹다 남은 치킨 세 조각을 데우면서 미니 단호박 하나를 함께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마트에서 단호박을 파는 아줌마가 딱 4분만 돌리라고 했는데 주체적인 사고를 하던 이틀 전의 나는 6분을 돌려 물컹해진 단호박을 입에 넣으며 후회를 했었다. 그래서 오늘은 딱 4분 돌렸다. 단호박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사이 우무를 데치고 편 썰기를 했다. 드디어 딱 4분 돌린 단호박에 칼이 들어간다. 아! 1분 더 돌릴 걸.  4분은 마트 아줌마네 집 전자레인지 기준이었나 보다. 우리 집은 5분이 적당하다. 조금 단단하지만 꼭꼭 씹어 먹는 게 다이어트에 좋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하얀 사기그릇에 노란 단호박을 숭숭 썰어 넣었다. 그 위엔 방금 데쳐서 탱글탱글한 우무를 수북하게 쌓았다. 이렇게 수북하게 쌓아놓고 먹어도 50kcal가 채 안 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어제 산 대추 방울토마토를 뽀득뽀득하게 씻어 한 대접 담았다. 오늘의 메인디쉬는 어제 먹다 남은 눅눅하지만 따뜻한 교촌치킨 날개 세 조각과 다리 한 조각. 다과상에 담아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혹시 엄마가 '왜 들어가서  먹어?'라고 물으면 다들 자는데 소란 피우기 싫다는 이유를 대려던 참이었지만 사실은 무심결에 엄마나 동생이 치킨 한 조각을 들어 올릴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이기적인 밥상을 들고 방으로 쑥 들어오니 밤새 비가 와서 공기가 차다. 바닥도 차다. 그래도 음식은 따뜻하다. 


푸짐한 아침상을 마주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릇마다 수북하게 솟은 음식들. 저걸 다 먹어도 되는구나 하는 행복감에 오늘은 누구에게든 여유를 좀 베풀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채하지 않도록 치킨 한입에 우무 두 조각을 섞어 꼭꼭 씹어 먹는다. 씹는 건 되도록 오래오래. 그래야 채하지 않는다. 2주 전 이마트 급채 사건으로 요즘 한참 몸 사리고 있는 중이다. 급기야 화장실 바닥에 드러눕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던 그날 화장실 바닥을 깨끗하고 건조하게 관리해 둔 청소담당 아주머니가 가장 고마웠다. 


기분 좋게 위장을 배려하는 아침식사에 집중하고 있는데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중요하지 않은 몇몇 잔소리와 잔소리가 아닌 또 중요하지 않은 몇 마디를 하느라 몇 번이나 벌컥, 방문을 기습적으로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행거 앞자리에 내 옷을 잔뜩 걸어서 엄마 옷이 다 구겨져있지 않느냐고 타박했다. 행거 앞자리에 내 옷이 몇 개나 걸려 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나는 30년 넘게 내 방문을 벌컥 여는 것에 대해 불만이 가득한 상태이다. 아무리 얘길 해도 엄마는 고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로 한 1년간은 문을 잠가 두기도 했었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면 꼭 샤워하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당황스럽고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엄마는 방문을 '벌컥' 여는 것으로 나를 링 위에 불러놓고 두어 번의 잽과 강력 펀치 한 방을 먹인 것이다. 공이 울렸고 드디어 유치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 엄마도 뒷자리가 걸기 힘드니까 앞에 건 거잖아. 

- 그러니까 왜 앞에 걸어서 다 구겨지게 만드냐구. 

- 원래 엄마 옷이 잔뜩 걸려있어서 그런 걸 뭐.

- 뒤에다 걸었으면 됐는데 다 구겨졌잖아.

- 엄마도 뒷자리에 걸기 힘들어서 그런 거잖아. 나도 뒤에 걸기 힘들어. 

- 거기 말구 저 뒤쪽 말이야. 

- 그러니까, 거기 높아서 걸기 힘들어서 엄마도 안 쓰는 거잖아.


이런 말싸움은 말이 끝난 후 곱씹을수록 사골 우러나듯 나쁜 기분이 진하게 우러나온다. 대체 어떤 상황인 건 지 현장을 봐야겠기에 방문을 열고 현장에 가봤더니 바닥에 툭 하고 아무렇게나 겹쳐져 살짝 우그러진 내 봄 재킷 두개가 눈에 띈다. 기분도 구겨졌다. 마침내 짜증 발사!

- 내 건 두개밖에 없잖아!

- 앞에 두개가 보여서 다 니 건 줄 알았어. 

- 이렇게 막 두면 내 건 안 구겨져? 

- 엄마가 저녁에 다 정리할 거니까 거기다 둬 

- 이렇게 두면 다 구겨지잖아!


씩씩 거리며 높은 뒷자리 행거에 억지로 재킷 두개를 걸다 보니 화가 더 치밀어 오른다. 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불쾌한 일을 만들어버렸다는 게 화가 나서 씩씩 거렸다. 그리고 최대한 화가 난 것을 티 내기 위해서 쿵쿵 걸어나와 꾹 잠그고 누웠다. 이어폰 볼륨을 높여 '삼시 세 끼'를 다시 본다. 밖에서 엄마가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내 방문을 쾅쾅 두드리지 않는 걸 봐서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거나 중요한 말이 아니거나. 약 한 시간 후 엄마는 교회로 갔다.


사과를 먼저 해야 하나? 

카톡을 보낼까? 아니야, 난 아직 화가 나 있어. 엄마는 늘 뭔가 일이 벌어지면 엄마 잘못은 찾아보질 않는다니까. 내 탓이 아닌 일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어. 이번엔 아니야. 사과 안 해야지. 그래도 뭐 엄마가 내 옷을 그렇게 구겨지게 뒀던 것도 아닌데, 그걸 보고 짜증을 낼 것 까진 없었는데. 그냥 ' 내 옷은 두 개 밖에 없잖아~' 하고 가볍게 웃었으면 됐을 텐데. 하지만 나는 쿨 하지 않은데 어떡해. 행거에 내 옷이라고는 정말 다섯 개도 채 안되는데,  그중 세 개는 그 구석진 뒷자리 행거에 걸려 있잖아. 억울해! 

찝찝한 상태로 교회에 갔다가 결국 숙면을 취했다. 하필 앞자리에 앉아서 졸았다. 아니다. 졸지 않았다. 잤다. 내 자리 앞쪽 남자분의 상당히 큰 머리에 내가 가려져서 목사님 눈에 잘 안 띄었길 바랄 뿐이다. 죄송해요 목사님, 2주 연속 졸았어요. 다음 주엔 꼭 아침 7시 반에 눈뜨지 않도록 밤에 물을 조금만 마시고 잘게요. 


저녁엔 엄마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면서 풀어야지. 이런 싸움은 밤을 넘기면 제일 미련한 짓이다. 아님 집에 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서 또 아무렇지 않게 물어봐야지. '엄마, 영양제 다 떨어진 거 없어?' 30년 넘게 같이 살아도 여전히 안 맞는 게 많은 모녀 사이. 아웅다웅 물도 뜯고 오늘도 피곤하게 산다.  푸짐한 아침을 먹는다고 여유를 베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바보 같았다. 먹는 것과 태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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