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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03. 2019

히든카드

이상한 말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재방송 인생을 사는 기분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고 애틋하고 그리운 시간을 회상하며 도돌이표를 도는 것 같았다. 고민도 새롭지 않았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고민은 버거워도 대체로 익숙한 짐이었다. 더 깊어지거나 복잡해졌을 뿐이었다. 서른을 맞이할 때 나이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지 친구가 물었다. 서른엔 감흥이 없었다. 스물아홉, 서른, 서른 하나가 다르지 않았다. 어제와 오늘이 숫자 때문에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최근 들어 만나본 적 없는 고민들이 나타난다. 마흔을 생각할 때가 되니 모퉁이를 돌면 전에 모르던 것들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긴장이 생겼다. 처음 살아보는 나이라는 말이 저만치 다가왔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다. 결혼한 지 10년 된 친구도 그렇다고 했다. 아무 문제없는 평범한 날들인데 갑자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심연을 들여다보는 여름을 보냈다고 했다. 일상은 달라진 게 없는데 무엇이 마음에 들었기에 갑자기 나를 흔드는 것인지 한참 들여다보았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들어주기만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친구 말은 ‘내가 사라지고 있는 불안이 무섭다.’는 뜻이었을까 생각했다. 가족 안의 내가 아니라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마음이 부르르 진동을 보낸 것 같다.


생물학적으로 사람의 모든 세포는 7년마다 완전히 변한다. 이전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만들어지는 일이 7년 주기로 돌아간다고 하니 7년 전의 나와 지금 나는 물리적으로 다른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 그렇다. 7년마다 나는 달라졌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했던 것일까. 비슷한 줄로 착각했지만 결이 다른 고민이 나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게 많아지면 조금 다른 걸 만나는 게 반갑다. 내가 매일 보던 방식이 아닌 해석을 주는 사람이 나는 모르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나 많이 겪어봐서 배포를 키운 사람이나. 내가 서른에도 겪어본 적 없고 지금도 겪어본 적 없는 일을 누구는 스물에도 겪고 서른에도 겪는다. 내 나이테도 의미 있지만 그런 사람들의 나이테는 더 진하고 향기마저 날 것 같다.




엄마는 오랫동안 비슷한 패턴을 반복해왔다. 어릴 때는 명절마다 큰집 가는 여객선에서 반드시 돈가방을 잃어버렸다. 장소도 매번 화장실이었다. 나는 엄마가 가방을 잃어버리려고 화장실에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화장실에 돈가방을 들고 가는 이유는 무엇이고 아빠는 뻔히 예상되는 일을 말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았다. 뱃길에서 몇 십만 원씩 잃어버리는 게 명절 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지폐들이 나풀나풀 날아가는지도 모르고 가방을 활짝 열고 뛰어다니다가 "어머어머 난 몰라." 하는 일은 흔한 해프닝이었다. 지갑은 수시로 잃어버렸다. 올해도 카드 분실신고를 몇 번 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어제는 급기야 가방을 지하철에 벗어놓고 내린 것이다. 하필 은행에서 큰돈을 찾은 날이었는데. 동생이는 탄식했다.


어떻게 일생을 변하질 않아?
엄마가 일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어떻게 달라지겠냐?


예전 같으면 엄마가 잃어버린 현금이 아깝고 속이 상해서 잔소리를 해댔을 텐데 이제 잃어버린 돈은  빨리 흘려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그랬던 것 같다. 동생이만 아직도 화가 나 있었다. 작은 돈이 아니니 미련이 남지 뭐. 50만 원이 적냐고.



엄마가 오늘 그게 종일 신경 쓰여서 기운도 없고 소화도 안돼서 박카스도 먹고 활명수도 먹었잖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소고기를 먹어야겠더라고. 그래야 기운이 생길 거 같더라고. 그래서 좀 샀어.


익숙한 일인데 엄마의 대처는 달라졌다. 종일 속상하다고 푸념하지도 않고 소고기를 사 먹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갑작스럽고 놀라운 변화다. 엄마의 새로운 방식에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다. 간이 콩알만 한 엄마가 이렇게 대범해진 것이 신기했다. 밤에는 사과를 깎아먹다 말고 아귀찜 잘하는 집 찾았는데 같이 함 가서 먹을까, 꽃게를 사다가 찜을 해야겠다. 하는 얘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내가 돈 잃어버리고 할 소리는 아닌데.


하고 피식피식 웃었다. 그것은 판을 흔드는 엄마의 깜찍한 히든카드였다.  


내 손에 든 카드 중 어떤 카드는 두장이 겹쳐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손을 조금 비틀면 히든카드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 비틀어봐야겠다. 익숙한 것이 새로워질 것 같다. 묘한 기대가 생긴다.새로운 나이가 오고, 모퉁이를 돌면 모르던 것들이 쏟아져 내리면 나도 손을 조금 비틀어 히든카드를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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