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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29. 2016

왜 거기에 있어?

방 정리를 하다 보면 기념한 것이 참 없는 내 인생을 발견한다. 다녀온 여행지마다 마그넷을 사 모으는 흔한 취미조차 꾸리지 못했다. 몇 가지쯤은 기념해야 했는데 후회 된다. 학창 시절 열심히 낙서하던 교과서, 스무 살 첫 번째 여행기록 같은 것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기념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첫 월급으로 기념할 만한 무언가를 사지 않았다. 이직을 기념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 1년 차에 쉘리 님이 


둥둥 아, 오늘이 작가 시작한 지 1년이구나. 저녁엔 축하라도 하자. 


라고 했을 때 이런 날을 기념해두는 게 뿌듯할 수 있겠다고 처음 생각했다. 나도 기념하지 않는 날을 먼저 기억해주는 게 놀라웠다. 입봉 하는 날, 나흘을 박혀있던 편집실에서 나왔을 때 회식할 기력도 없이 쓰러질 줄 알았지만 기념한다는 기쁨에 새벽까지 펄펄 날았다. 케이크의 초를 끄고 새벽까지 축하해주는 무리 덕에 기분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입봉작 주인공 부자에 대한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쉘리 님이 책을 챙겨주셨다.


여기 네 이름이 밀린 건 오프라 윈프리보다 알파벳이 밀려서 그런 거다. 


‘기념한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구나.’ 생각했다. 생일엔 꼭 자정 전에 케이크의 촛불을 불어야 한다는 흔한 기념조차조차 요즘은 재미있다.‘기념하는 삶’에 제법 도움이 되는 것이 카메라다. 엄마의 예순 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저녁을 먹고 사진을 남기면서 카메라 진작 살 걸 후회했다. 


기념할 것이 별로 없지만 다행히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2004년 다마스쿠스 재래시장에서 산 보물 상자가 하나 있다. <인디애나 존스>에서 소품으로 쓰였을 것 같은 보물 상자를 2만 5천 원에 샀다. 재질이 가격에 비해 고급스러웠고 꼭 하나 갖고 싶던 모양이라 흥정없이 바로 샀다. 배낭 매고 두 달은 더 다녀야 하는데 끼고 다니기엔 거추장스러웠지만 모두 감수할 만했다. 그 안에 몇 가지 기념하고 싶은 것들을 넣어두었다. 자주 꺼내보지는 않지만 꼭 기억하고 싶은 날의 흔적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한 가지 흔적이 더 있다. 너덜너덜 해지도록 첨삭을 받았던 막내작가 시절의 보도자료. 노란색으로 더 이상 표시할 곳이 없을 만큼 밑줄을 그어놔서 고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쓰는 게 낫겠다 싶었던 보도 자료를 버리지 않은 것은 참 잘한 일이다. 입봉작 초고도 버리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부끄럽지만 용케도 보관했다. 하지만 정말 단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다시 보면 얼굴이 불타 없어질 것 같다. 


내 인생의 변화는 가을에 찾아오는 편이었다. 방송을 시작한 것은 늦여름 가을 초입. 방송을 떠난 것은 초가을. 다시 지금의 일을 시작한 것 역시 초가을. 가을이 되면 마음이 들썩 거리는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있게 되면서 대화가 늘었다. 어느 날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다가 엄마가 불쑥 물었다. 


둥둥 아, 꿈이 뭐야?


엄마에겐 어릴 때나 받아봤던 질문. 사춘기 전까지 자주 들어본 질문인데 대답할 때마다 꿈이 바뀌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질문을 전혀 예상 못한 순간 듣고 무척이나 당황했다.


왜? 몰라..
그냥. 뭔데?
난 글 쓰고 싶어. 


다음 엄마의 말에 나는 멍 해졌다. 


그런데 왜 거기에 있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엄마의 질문은 길 잃은 나를 흔드는 손 같았다. 가을은 아직 멀었는데. 아직 멀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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