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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04. 2016

오뎅탕아 기다려라 !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는 이미 캐리어와 함께 사라졌다. 여전도회에서 무려 67만 원이나 내고 단체 호갱 패키지로 제주도에 가는 날이 오늘이다. 영 바가지를 쓴 것 같다고 잔뜩 화를 내었지만 커뮤니티 내 품위 위지를 위해 이의를 재기할 순 없다던 엄마는 간밤에 핫 핑크 꽃무늬 수면바지를 고심해 고르더니 동이 트기도 전에 기척 없이 사라졌다. 엄마가 떠난 자리를 보니 어젯밤 귤이랑 한라봉, 갈치를 사 오고 싶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 머리를 감으면서 엄마에게 충분한 돈이 있던가 생각했다. 따뜻한 물로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잠시 방에 앉아있으니 머리카락이 얼음마녀의 드래드 머리처럼 덩어리째 얼어붙기 직전이다. 서둘러 머리를 말리다가 잠시 한 손을 빌려 효녀 짓을 했다.


엄마 10만 원 보냈어. 혹시 뭐 살 거 있을까 봐.


물론 이번 여행 경비 중 45만 원이 내 돈이다. 지난달에는 올해 모은 돈을 몽땅 끄라비 삼 모녀 여행에 털어낸 이 집안의 기둥, 나는 (비실거리는) 살림 밑천 첫째 딸이다. 먼지 같은 재력을 탈탈 털어 엄마에게 여흥 넘치는 예순 한 살을 선물하자는 결심은 이미 연초에 했던 바. 최대한 모든 자금을 엄마에게 양보한 후 12월 나를 위한 5일짜리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했는데 이에 대해  아끼라는 애정 어린 충고를 망설이지 않던 엄마가 오늘 아침 섬나라로 떠났다. 출근 준비로 바빠 재차 확인하지 못했지만 어젯밤 기억으로는 가스레인지 위 칼칼한 오뎅탕이 엄마가 남 반찬의 전부였던 것 같다. 엄마, 나는 오뎅탕 싫어해요.



갑작스럽게 냉 도는 11월을 마주한 쭈구리 직장인으로서 윗배에 어제 산 핫 팩을 딱 붙이고 집을 나서니 마음이 든든하다. 세탁소에 맡긴 겨울 외투를 내 것만 빼고 모두 찾아온 어머니 덕분에 지금 나는 겨울 외투가 없다. 세탁소 아저씨는 2주 후에나 배달해주신다고 엄포를 놓았다. 지난봄부터 세탁물을 너무 오래 맡겨둔 처지에 그저 네, 감사합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두꺼운 가을 코드를 찾아 안으로 두툼하게 3겹 챙겨 입고 부츠도 신었다. 짐짓 비장하게 골목 입구에 서니 쥐새끼 잡는데 사자를 끌어온 것 같은 민망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추위가 몰고 오는 초라한 기분이 싫다. 나는 오늘 충분히 reasonable 한 대응을 했다. 기껏 추위를 이기고 출근한 후 마주친 당황스러운 일 때문에 윗배에 붙인 핫팩보다 몸이 더 뜨거워다. 핫팩을 당장 떼 버릴 수도 있었지만 12시간짜리 핫 팩은 아직 3시간밖에 쓰지 못한 상황이다.


역시 인생 독고다이로구나. 알면서 또 속은 내가 미련했다. 내 잘못이다.


오늘의 교훈을 주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제가 아직 덜 되어 그런가 봅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역시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는 내 인생과 땔 수 없는 명언이다. 한기와 열기가 안팎으로 나를 짓누 덕분인지 며칠 동안 소식 없던 화장도 다녀왔다. 좋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이었다. 점심엔 옛 직장상사와 약속을 해 두었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고 그저 욕을 나누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도 이토록 추운 날 직접 방문하여 주시는 옛 팀장님을 앞에 두고 상스럽게 굴 수 있나. 오늘의 화를 잘 챙겨두었다가 퇴근 후 집에 가거든 오래전 (아마도 지난겨울) 디저트 샵에서 눈여겨보아 샀던 아사히 미니 캔을 따야겠다. 아!  오뎅탕은 이 순간을 위함이었나! 엄마, 왠지 오늘 오뎅탕에선 짠 내가 날 것 같아요.



어머니,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 다녀오셔서는


너는 애가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라고 뜬금없이 저를 혼내셨지요. 그것은 제가 늘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여 다각적으로 사고하는 어린이였기 때문이었어요. 오늘의 저처럼 말이에요. 세상을 안다면 긍정적으로 살기 어렵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을 냅시다.’를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오뎅탕과 아사히를 바라며 하루를 살고 있어요.


독고다이 인생에 오뎅탕과 아사히만 바라고 있기엔 힘이 좀 부대끼는 지라 점심엔 의리 있는 오랜 친구들과 영혼까지 따끔하게 매운 요리를 먹으며 위로받아볼까 해요. 흐리고 바람 부는 용두암 앞에서 셀카봉을 챙겨주지 않은 딸내미 욕을 하고 있을 어머니. 부디 즐거운 여행 하고 오세요. 오뎅탕 잘 먹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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