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아직 또르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냉방에 박한 회사지만 얼마 전 직원들이 더워 죽겠다 한바탕 소동을 부린 후엔 더 이상 말이 나지 않도록 신경 쓰는 눈치다. 그래도 부족한지 공용 선풍기에 개인 선풍기까지 틀어 재끼는 양 옆 동료들 틈에서 나는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마신다. 출퇴근길엔 시민들 항의에 겁먹고 냉방을 아끼지 않는 지하철에서 닭살 돋은 팔을 수시로 문지른다. 결국 밖에 돌아다닐 시간이 별로 없고, 잠시 돌아다닐 때는 건물 안에서 몸을 가득 채웠던 한기가 스르륵 풀려나오기 때문에 땀 흘릴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여름엔 자고로 땀을 쭉 흘린 후 시원하게 샤워하는 맛이 있는 건데. 물론 아직 여름의 시작일 뿐이니 기회는 많다. 게다가 우리 집은 열기가 대단해서 매년 여름 집 밖으로 탈출하는 여름을 보냈지 않은가.
여독이 덜 풀렸는지 아직 시차 적응 중인 건 여행 후 2주 간은 참기 어려운 피로와 싸워야 했다. 회사에서 자꾸만 내려오는 눈꺼풀 때문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는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혹은 최근 두 달간 누적된 피로 때문에 보양식이 필요했던 걸까? 초복을 그냥 지나친 것은 실수였을까? 푹 삶은 삼계탕 한 마리와 인삼을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었어야 했나? 아무리 더위를 안타는 체질이라지만 여름이 시작되고 땀을 제대로 흘리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아무래도 초복을 그냥 지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급하게 백숙이라도 대충 삶아 먹었어야 했다. 맨날 먹는 닭이라도 초복에 온전한 닭 한 마리를 푹 삶아 뜯어먹는 의식이 필요했다. 닭을 먹고 싶어서 만든 핑계가 아니다. 그건 정말 무사히 여름을 건너가기 위한 전투식량 같은 것이다.
바닥에 누워 놓쳐버린 백숙을 묵상하는 동안 고소한 냄새가 난다. 생각이 깊으면 후각도 동참하는 가보다. 아니다. 이것은 문 밖에서 무언가 조리되는 냄새다. 방문을 열어보니 지난주 수술을 한 엄마가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고 사골을 끓이고 있었다. 들통에서 팔팔 끓는 소뼈.
(아, 사골이었구나. 아쉽군. 저렇게 많은 사골 국을 엄마가 다 먹을 수 있을까? 나와 동생이는 사골을 안 좋아하는데.) 헉! 그렇게 많이 끓여?
둥둥이 너도 한 대접씩 마셔.
(어머니, 사골이 정말 영양가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습니다. 둥둥 떠 있는 기름이 너무 거슬려서 한 대접이나 마시기는 쉽지가 않네요.) 난 사골 안 좋아하는데...
이게 얼마나 열심히 끓인 건데. 몸에 엄청 좋아.
사골에 대한 엄마의 믿음은 냉장고에 대한 믿음과 비슷하다. 최근 동생이가 냉장고를 비워내면서 많은 것을 버렸다. 급기야 2014년 생산된 어묵이 나왔을 때, 나는 냉장고에 대한 엄마의 맹신을 보았다. 몰래 버려도 전혀 기억 못 한다는 걸 알고도 일부러 엄마 앞에서 냉장고 정리를 시작한 것은 메시지 있는 퍼포먼스였다. 분명한 것은 엄마는 냉장고를 타임캡슐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믿음을 바로잡는 것은 쉽지가 않다.
‘냉장고 속사정은 내 알 바 아니오.’ 하고 팔팔 끓는 사골을 보니 한참 우려내고 버려질 소뼈에 묘한 감정이 이입된다. 물끄러미 들통을 보다가 한여름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더위에 기 빨린 신세타령은 접어두고 기력을 회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J는 장어만한 게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장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골에 이어 장어까지. 이제 나는 보양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세워봐야겠다.) 기름진 장어는 양념을 하든 소금에 찍어먹든 진한 기름 맛이 전면에 튀어나와 도무지 물고기 맛을 느낄 수가 없다. 사골도 장어도 기름 장벽에 부딪혀 먹을 수 없다면 기름이 없는 보양식을 찾아봐야 하나?
몸이 축난 것 같아. 기력이 없어. 뭐 먹을 거 없나? 장어는 정말 맛이 없는데.
산낙지 먹어.
아니! 의외로 동생이 녀석이 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산낙지. 기름기 대신 에너지를 가득 품은 보양식. 가까이 포구를 둔 지리적 이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도 있는 참신한 메뉴. 특별한 음식은 토요일 오전에 먹는다는 가풍을 깨고 지체 없이 월요일 저녁 산낙지를 먹게 되었다. 낙지는 몸값이 비쌌다. 제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원에 2마리라니! 그럼 많이 먹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엄마의 적절한 협상 덕에 7마리를 2만 원에 살 수 있었다. 소프트쉘 무침(소프트쉘과 무침이란 서로 붙이기 어색한 조합인데 그럼 이 음식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아기게무침은 잔인하잖아. 작은 게 무침?)과 국 끓일 때 쓸 조개까지 묵직한 봉다리들을 들고 집에 오니 산낙지를 더욱 빨리 먹어야 할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좋은 플레이팅은 입맛을 돋우는 법. 폴란드 접시를 개시하기로 했다. 오묘한 푸른빛 접시 중앙에 폴란드 장인이 직접 그린 꽃을 비밀스럽게 감추어줄 초록색 상추를 살짝 깔고 탕탕 자른 산낙지를 올리니 색이 별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플레이팅에 입맛이 좌우되는 사람이 아니다. 소금장을 만들어 착석하니 산낙지 양이 괜히 적어 보인다. 정말로 양이 적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적은 양을 쌈으로 무마해보려고 왼손에 상추 한 장 깻잎 한 장을 올리고 오른손으로 낙지를 집어 소금장에 찍으니 요 녀석들이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린다. “미안 미안.” 하고는 왕! 입속에 넣어 최대한 오래오래 꼭꼭 씹는다. 내가 장어를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엄마와 동생이는 산낙지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비려.
냄새에 쓸데없이 민감한 동생이가 가장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앗싸!) 비리다구? 나는 모르겠는걸.
곧이어 엄마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큰딸 많이 먹어.’라는 코끝 찡한 모성이었을까? 우선 낙지 다 먹고 다시 생각해야지. 혼자 4마리쯤 먹은 것 같다. 끈적한 낙지의 흔적이 남은 상추. 더욱 반짝이는 폴란드 접시만이 남았다. 오늘 먹은 낙지는 맛으로 먹은 것이 아니다. 긴 여름을 건너야 하는 근로자로서 전투를 앞두고 무기를 다듬는 장수의 심정으로 먹은 것이다. 하필 그것이 맛이 좋았을 뿐. 초복을 놓치고 뒤늦게 산낙지를 먹은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어느새 중복이다. 이번에도 백숙을 준비하지 못했다. 하루 늦었지만 내일 백숙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동생이가 주문해놓은 닭똥지...아니 닭모래집 볶음을 먹어야 한다.
어머! 오늘이 벌써 중복이니? 백숙 먹을래? 내일 먹자. 오늘은 저거 먼저 해치워.
(해치우다뇨 어머니. 제가 뭐 음식을 마구잡이로 먹어치우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우선 먹기는 먹을 건데요. 맛으로 먹는 거니까 그건 알아주세요.) 알았어. 백숙에 인삼 많이 넣어줘. 한약재도 있어?
꼼꼼하게 재료 주문을 마치고 내일을 기다린다. 여러 사람들이 내가 원조다!라고 외치는 그 말을 이쯤 다시 한번 꺼내본다. 무엇을 먹느냐가 바로 나를 만든다. 산낙지와 닭모래집과 백숙을 먹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보양식을 잘 먹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양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가설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방콕과 하노이만큼 더운 7월 말의 여름. 발리보다, 치앙마이보다 더운 한국은 보양식 없이 버틸 수 없는 습기와 불쾌지수가 지하수처럼 흐르는 곳. 오죽하면 우리 선조들은 여름"나기"라고 했을까. 각오 단단히 하고 여름을 버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