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의도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배신감이 컸다. 메르카도르 도법의 지도가 정답은 아니라는 걸 알고 왜 한국에서는 메르카도르 도법 지도를 가장 많이 쓰고 있는지 궁금했다. 편향된 정보만 제공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뒤늦게 억울했다. 내가 늘 보던 북반구 중심의 지도가 아니라 남반구 중심의 지도를 봤을 때도 내가 주류라고 믿는 것이 단 하나의 주류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고정관념을 깨우는 신호들은 곳곳에 숨어있고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꽤나 자주 지도를 통해 고정관념을 발견했다. 내가 익숙했던 지도 자체가 고정관념 자체가 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히 길치인 데다 지도 읽기는 영 소질이 없지만 지도를 보는 것만큼은 흥미로워하는 편이다.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지도를 보는 일은 흥미롭다. 특히 낯선 지역의 지도는 자세히 볼수록 즐겁다. 요즘은 지도 앱 덕분에 요리조리 확대하면서 볼 수 있으니 지역 특성도 나름대로 추리해보는 맛이 있다. 지도에 의도가 있다는 걸 알고 배신감을 느꼈던 때가 있었지만 지도를 읽고 보는 대도 다 의도가 있다. 그래서 한참 뒤에는 의도 없는 지도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처음 지도 그리기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 동네 지도 그리기를 숙제로 내주셨는데 같은 동네 사는 친구들끼리도 모두 다른 지도를 그려왔다. 관심과 시선이 다르니까 지도가 다르다. 역시 지도엔 의도가 있어야 맛인가 싶은 생각까지 와버렸다. 삼국지연의 보다 나관중의 삼국지가 훨씬 재밌는 것과 같은 맥락 아니겠나.
지도를 보는 일이 재미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리에 관심이 생기고 그쪽으로는 지식이 일천하다 보니 최근에 책을 몇 권 샀다. 지도를 좀 더 맛있게 볼 수 있을 것 같았고 도움이 되기도 했다. 역사는 사라져도 지리는 남는다고 한다. 서울의 지도만 봐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탄천 지역의 변화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강남 일대 변화는 또 얼마나 맛있는 이야기인가.
지도 자체가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하다. 누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지, 어느 도시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 자체만으로 이야기를 품기도 한다. 프랑스 칼레는 위치 만으로 이미 수많은 사연을 예견할 수 있다. 칼레의 불법 이민자들, 너무 많은 생명을 삼켜서 ‘붉은 강’이라 불리는 강을 건너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가려는 아이티 난민들, 멕시코 국경을 넘으려는 사람들. 그런 이야기가 어린 '국경'은 지도에서 내가 가장 자주 보는 곳이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겐 모두 사연이 있다. 개별의 사연을 품고 국경을 넘지만 그 개인이 모여 하나의 현상이 된다. 국경을 넘는다는 건 세계 어디에서든 이슈가 된다. 조금만 귀를 기울인다면 뉴스에서 거의 일 년 내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반도의 허리를 넘는 사람들은 언제나 뉴스거리가 되지 않나. 국경을 넘는 많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불리지만 '난민'밖의 사람도 많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른들의 보살핌 없이 국경을 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지도를 건너 새로운 땅에 발을 딛는다는 건 역사에 기록되는 ‘모험’, ‘발견’ 이 될 수도 있지만 ‘사건’이 될 수도 있는데 이제 지구 위에 우리가 모르는 땅은 없으니까 내가 접하는 지도 위의 이동 열에 아홉은 사건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누구나 아는 몇몇 사건들이 떠오른다. 가끔은 떠들썩했다가 쉽게 관심이 식었다가 몇 주년이란 이름으로 다시 뉴스에 등장할 때면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소식에 잠시 또 숙연해진다. 물론 세상 모든 고통에 반응하며 살 수는 없다. 시몬 베이유처럼 “전 세계에 맥박이 울리는 심장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그녀처럼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실제로 베유는 그런 편이 있던 것 같다. 그녀는 여섯 살 때 1차 대전 참전 군인들에게는 설탕이 없다며 자신도 설탕을 먹지 않았다. 고작 여섯 살인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난방을 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자신도 난방을 하지 않았다. 대단하고 고통스러운 공감능력이다.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리면 당연히 주입식 교육의 산물인 나는 메르카도르 도법 지도를 펼친다. (다른 지도를 좀 더 자주 봐야지 안 되겠다.) 내가 만났던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지도 위에 놓인다. 우간다, 르완다, 남수단, 앙골라, 시리아, 태국, 탄자니아, 아이티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 탈북 청년까지. 그들 대부분의 사정이 크게 좋아졌을 리 없다. 그런 사실 때문에 가끔은 관심을 가진다는 게 괴롭다. 관심이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걸 볼 확률은 낮고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린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에겐 꾸준한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한 사람의 지속적인 관심은 아니어도 교차로 오가는 여러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할 것이다.
지도를 볼 때 국경을 자세히 보는 버릇이 있고, 그 안에 분명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정량 이상의 적극적인 관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건 조금 나쁘다는 생각이 드네. 그래도 내가 관심을 잃는 동안에도 그 위로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교차로 오가고 있기를 바란다. 일시적이라도 더 많은 관심이 깜빡깜빡 빛을 내며 오가면 결과적으로는 그 위에 빛이 꺼지지 않게 될 테니까. 오늘 밤은 시리아를 위해 기도하며 깜빡깜빡 다시 불을 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