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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30. 2016

사회생활에서  전투력이 부족하면 생기는 문제

경쟁은 어떤 방식이든 즐겁지가 않았다. 1등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를 얻기까지 경쟁의 압박과 스트레스에 납작 오징어가 되었는데 1등이 무슨 소용이. 그저 끝이 났다는 안도감뿐이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경쟁은 자연스러운 문법이었다. 팀끼리 동종업자끼리 실적으로 비교당하고 차별당하는 게 당연했다. 실적 좋은 팀은 총애를 받는다. 새해 팀 목표를 세우다가 몇 해 째 실적이 좋지 않은 팀에 속해 있기에 받는 시선들이 새삼 씁쓸했다. 경쟁 속에 마지못해 쓸려가고 있어서 나는 내일도 출근하기가 싫다.

경쟁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성적표에 53명 중 몇 번째로 시험을 잘 봤는지 표시해주는 건 정말이지 싫었다. 53명 중 몇 번째든 그 숫자 앞뒤 친구들과 나를 비교당하며 눌리고 치이고, 또 지난번보다 몇 번째나 뒤로 밀렸는지 계산하며 나 자신과도 경쟁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비평준화 지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건 불행한 일이었다. 중3이 되자 선생님들은 우리 지역 명문으로 불리던 P여고와 P고를 들먹거렸다. 특히 영어 선생님은 자기가 본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밤 10시에도 불이 환하게 켜진 P여고 건물이라고 수시로 중얼거렸다. 혼잣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마치 연극배우의 독백처럼 창밖을 보며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창문을 통해 P여고의 불 켜진 건물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중 3이 되자 엄마가 거들었다. 너랑 그 학교 교복 사러가는 게 소원이다. 그 학교 애들 교복 입은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자꾸 쳐다보게 되더라는 말을 습관처럼 들었다. 산만하고 공부에 취미 없던 나는 1, 2학년 동안 그저 그런 성적으로 시험 때마다 엄마의 기대를 조금씩 꺾어두었건만 엄마의 희망은 잡초처럼 다시 일어섰다. 열여섯 살 중학생들 사이엔 고등학교 재수라는 재수없는 소문이 돌았고 우리는 고등학교에 못가는 애들이 반에 몇 명씩 있더라는 실체 없는 위협에 쉽게 겁을 먹었다.

다행히 마지막 1년 간 나는 제법 성적을 올렸고 한껏 부풀어 있던 엄마의 기대를 겨우 채워주었다. 교복을 맞추던 날 엄마 얼굴에 홍조를 봤다. 그게 불행의 시작일 줄이야. 겨우 경쟁의 문턱을 넘어 재수하지 않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더니 거긴 더 큰 경쟁의 정글이었다. 비평준화 지역 고등학교란 그런 것이었다. 입학고사를 치르고 성적표 받던 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방에 들어가 조용히 눈물을 뚝 흘렸다. 엄마는 혼내지도 않았다. 이미 경쟁의 칼날에 찔리고 베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후로 나의 성적은 화려하게 널을 뛰었다. 1학년 5월, 뻔질나게 교생 휴게실을 드나들 때 즈음엔 대범한 숫자를 성적표에 찍었다. 앞보다 뒤에서 세는 게 빠른 상황이었다. 전교 650명 중 530등쯤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렀다.


둥둥 아, 교생실에 자주 다니는 거 봤다. 그래서 그런 거지?
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이 적당한 이유를 찾아주었으니 나는 성적이 왜 그 모양인지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사실 성적 떨어지는데 이유가 따로 있나. 뻔 한 걸.

 

다음번 성적을 다시 돌려놓으면 엄마에겐 비밀로 해줄게.
네...

결국 그때 성적표는 엄마에겐 비밀이 되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선생님이었다. 나는 용두사미의 전형이었다. 학년말로 갈수록 성적은 가관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한 번 있었다. 전교생이 나만 빼고 무슨 돌림병에 걸렸는지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 전교 4등이라니. 이건 좀 곤란하다. 적당히 올라야 뿌듯하고 자랑도 좀 하는데 이건 아니다. 성적표가 날 놀리나 싶어서 자랑도 못했다. 엄마도 당황한 것 같았다. 썩 중요한 시험이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성적표에, 그 숫자놀음에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1학년 1학기 때 나는 수학 선생님을 열렬히 좋아했다. 30대 초반의 순수한 수학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 인기도 제법이었다. 나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수학 문제를 아무거나 찾아서 자주 선생님을 찾아가곤 했다. 물론 설명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서서 선생님이 문제를 푸는 소리를 듣고 서 있었다. 과목 선생님 좋아하면 성적 오른다고 누가 그러던가. 다 뻥이다. 내 수학은 형편없었다. 나는 지금도 숫자랑은 상극이다. 그런 나와 수학 사이를 영영 닿을 수 없는 평행선으로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들을 경쟁시켜 줄 세우는 것도 모자라 제대로 낙인을 찍는 ‘수학 우열반 제도’라는 것이 시행된 것이다.

누구 생각인지 실패할 게 뻔 한 멍청한 교수법이었다. 불행히도 나의 친구 무리들은 모두 우반이었고 나만 열반이 되었다. 이름도 우반, 열반. 천박하다. 결국 한 학기 운영되고 폐지되었는데 열반의 어느 극성 학부모들(선생님들은 극성이라고 했지만 사회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바른 교육 사수대라고 부르고 싶다.)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가슴에 깊이 페인 상처로 나는 끝끝내 수학에 정 붙이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쟁을 부추기려던 선생님들의 패배였다. 아니다. 끝끝내 수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보지 못한 나의 완패였다.

방송을 할 때는 시청률 경쟁에 완패했다. 제작비와 시청률 압박 속에 프로그램이 문 닫는 일도 겪었다. 우리에겐 좋은 시간, 좋은 사람들이 마음을 맞춰 애정을 쏟은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일까. 몇 년 동안 우리의 술자리에선 아쉬움이 흘러나왔다. 이젠 실적의 압박을 받으며 살다 보니 경쟁이 뭐 별 거냐, 뒤처지는 것도 슬프지 않다. 세상은 경쟁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것처럼 굴러간다. 나는 그래서 아직 사람이 덜되었나 보다. 언제쯤 숫자 논리를 앞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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