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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pr 13. 2016

어떤 노래를 부를까?

우리는 앞을 보고 또 뒤를 본다.

그리고 찾는 것은 이 세상에 없는 것.

우리의 가장 진지한 웃음 속에는

약간의 고통이 배어있고

우리의 가장 달콤한 노래는 가장 슬픈 생각을 얘기하는 것.

- 퍼시 비시 셸리, <종달새에게> 중에서


시인의 노래

‘1년 동안 어른 됐다.’고 진지한 웃음을 넣은 말을 했다. 셸리의 시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가장 슬픈 시절을 지나 단단해졌을까?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그들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부추긴 말은 아닐까? 늘 소박한 행복이 모토였는데 그건 유니콘처럼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꿈인가 싶다. 모두의 인생에 몇 번은 중요한 기회가 찾아온다는데 나는 그런 기회를 만났을까?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맞다면 내 인생은 이제부터 대박이다. 기회가 후반전에 몰렸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반칙이고.



1년 만에 치킨 집에 다시 모인 역전의 동지들. 신나게 웃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성장하고 있는데 나만 더 흐물흐물해졌다. 그런 주제에 각성 없이 주책없이 숙주나 5번 리필 해 먹고 있었다. 지금 숙주나 먹을 때냐. 숙주가 좋냐.


행동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기쁨이 있다. 나는 지나치게 slow starter인 것이 문제다. 얼마나 요란하게 더 오래 시동을 걸어야 출발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림보는 오늘도 열심히 시동을 건다. 부르릉부르릉.


카나리아의 노래

옛날 광부들은 탄광에 카나리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호흡기가 약한 카나리아는 사람들이 감지 못하는 유독가스를 먼저 느끼기 때문이다. 사회의 카나리아 새 같은 존재가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 셸리와는 무관한 캡틴) 쉘님은 시대의 아픔을 가장 먼저 노래하는 존재가 시인인데 우리 시대는 울어주는 시인이 없다고 한탄했었다. 어디에나 카나리아가 있다. 그 시그널을 잘 알아차려야 하는데. ‘모두 병들었으나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가 생각난다. 오늘 참 생각나는 게 많네. 삶이 꿈틀거릴 때 미동을 빨리 감지해야 거대한 지각변동에 놀라지 않는 법이다. 나는 대부분 둔감하고 때때로 민감하다.



느림보의 노래

얼마 전 도시락을 싸다가 TV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음색이며 감정이 사람을 사로잡는 소리였는데 그는 다름 아닌 부활의 새로운 보컬이었다. 산업용 로봇 회 기술영업팀에서 일하다 어느 날 꿈을 이루었다고 했다. 가수로는 한참 늦은 나이, 서른둘의 데뷔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슬로우 스타터의 이야기에 끌리는 데가 있다. 박완서 선생님이나 움베르토 에코 같은 사람들의 늦은 데뷔가 실낱같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역시 꿈을 품고 사는 30대 직장인이었는데 정말 꿈처럼 꿈을 이루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매일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노력했을지 조금 짐작해본다. 시동 좀 오래 걸면 어떤가.



얼마 전 읽었던 '백의 그림자' 마지막 구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대단한 문장이다. 절망과 고단한 인생을 조용히 걸어가는 사람의 덤덤한 고백 같은 마지막은 이렇다. “노래할까요?”


인생은 불공평하고 나를 비웃을 때가 태반이며 배신하고 뒤통수치는 일이 다반사라는 걸 인정한다 한들 상처받지 않을 방법은 없다. 돈도 배경도 없이 미래도 불안한 주인공 무제 씨가 ‘노래할까요?’라고 말할 때 생각의 껍질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던 건 내가 무제 씨의 이야기에 무척 공감하고 몰입했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도 노래하자. 무제 씨처럼. 카나리아처럼. 시인처럼. 그 어떤 노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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