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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Feb 12. 2018

더 좋은 지도 앱은 언제 나오나

왜 이제 왔어.
길을 잃었어. 반대로 가고 있었어.
왜 반대로 갔어.
몰라. 지도를 따라갔는데 지도가 그곳으로 안내했어.
배고파. 가까운 데로 가자.
좋아. 순댓국 먹을래.


오늘도 길을 잃었다. 맙소사. 하필 이렇게 추운데 초행길이었다. 아니 사실 자주 가던 곳에서 초행길을 만들어 냈다. 모든 것을 지도 앱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완전히 망했다. 카뮈의 이방인 첫 문장보다 유명해질 것 같은 마션의 첫 문장이 떠오른다. “I'm pretty much fucked." 굳이 번역은 안 해야지. 아닌가? 번역하는 게 나을지도. ”아무래도 좆 됐다. “ 아, 역시 영문이 나은가. 에이 망했다.


사실 그렇게 억울하지 않았다. 지도 앱을 켜고도 자주 길을 잃는다. 분명 화살표대로 따라가고 있는데 막상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목적지에서 한참 반대로 걸어와 있다. 별 일은 아니다. “음. 오늘도 역시.” 하고 다시 원점으로 가면 된다.


길 좀 헤매는 것이 대수일까. 인생은 지나치게 길고 오늘 길에서 약간의 시간을 더 쓰는 건 아무 문제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날 친구를 무려 40분이나 기다리게 했다. 올해 저지른 최악의 실수다.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부채감이 되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았다니. 이런 일은 일 년에 1번도 일어나선 안 되는데. 나는 길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을 늘 계산에 넣고 30분씩 일찍 출발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지도 앱이 있기 전부터 나는 지도를 생활밀착형으로 활용해왔다. 약속이 정해지면 전날 미리 길을 검색하고 예상시간을 계산하고 지도를 출력해서 지갑에 넣고 길을 나섰다.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길을 잃을만한 지점들을 검토하고 그곳에는 더 자세한 건물 이름을 써두거나 신호등 위치를 여러 번 확인했다. 면허가 없지만 걸어 다니면서도 내비게이션 앱을 쓰던 자에게 지도 앱의 출현은 하나의 세계가 깨지는 대 변혁이었다.


지갑에 지도를 뽑아 넣을 필요도 없고 시시각각 선택할 수 있는 버스 옵션도 확인할 수 있다면 내가 길에서 버리는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줄여준다는 의미가 된다. 내 주위에 나 같은 부류가 많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각자 의탁할만한 지인들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생이는 길눈이 동물적으로 밝다. 하나님이 나를 만들고 보니 후각과 길눈을 빼먹은 게 생각나서 동생이에게 2인분을 준 것 같다.


지도 앱이 생기면서 의탁할 지인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생활이 시작됐다. 지도를 보는 방법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지도를 펼치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보고 어디에서 내가 출발할 수 있을지, 위치가 어디 어디인지 찾았는데, GPS 시스템 덕에 이제는 내가 선 곳을 중심으로 위치가 파악된다. 내가 선 자리에서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 보는 것이 편해졌다. 가끔 이 녀석이 정신 못 차리고 엉뚱한 곳을 짚어주는데 그게 바로 오늘처럼 날씨가 짜릿하게 추운 날이다.


수색 어디쯤인가에 덜렁 버려진 채 지도 앱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대체 어디에서 버스를 타라는 것인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내 위치를 알 수가 없다. 지도 위엔 목적지도 보이질 않고 억울한데 억울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국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택시를 잡아타고 30분이나 달렸다. 길을 잃을 땐 순식간이었는데, 되돌아가려니 먼 길을 가야 했다.


40분을 기다리게 한 친구에게 속죄하며 순댓국에 부추를 듬뿍듬뿍 넣어 먹으니 속이 풀린다. 오늘 만난 이유는 '좋은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보니 기념할 것이 없었다. 늘 기다리던 ‘좋은 날’이 분명 와 있는데, ‘좋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새로운 국면’ 일뿐.


어쩌면 ‘좋은 날’은 유니콘 같은 걸까?
진짜 ‘좋은 날’이 오겠지.


지도 앱을 들고도 길을 잃은 것처럼 ‘좋은 날’이란 시간이 왔는데, 좋은 날이 아닌 것 같았다.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이 자꾸 입 안까지 들이친다. 그래서 결국 오늘 두 번째 생각나는 그 첫 문장. “아무래도 좆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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