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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12. 2018

퇴사 : 이번 장르는 판타지 스릴러

무거운 어둠이 빠르게 숲을 장악한다. 부스럭, 삐-이걱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는 무리. 오랫동안 외부의 출입이 없었던 것이 분명한 외딴 산장. 어둠 속을 더듬어 딸깍-백열등을 켠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구조 요청을 위해 전화기를 드는데, 갑작스러운 암전. 전화기는 먹통. 무리 중 한 명이 누군가 끊어놓은 전화기 선을 스윽 들어 올리는데 어둠을 가르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린다.


여행을 떠났다가 고립된 폐가에 갇히는 스릴러 영화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았다.


아냐! 이건 내가 읽고 싶은 장르가 아니야!


첫 장을 열 땐 판타지 성장소설인 줄 알았는데 7년 동안 장르가 여러 번 바뀌더니 결국 스릴러 장르로 마무리될 뻔했다. 장르 조정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다행스럽게도 성공했다.



잠시 시간 되세요?
들어오세요.
(자리에 앉는다. 허리를 세우고 목소리는 낮춘다. 슬쩍 안도의 미소를 띤다.) 저, 퇴사하게 됐습니다.


이  순간통쾌한 복수극이길 바라지만 실상은 재미도 클라이맥스도 없는 직장인 이야기의 한 장면것이다. 어쨌든 스릴러물이 아니면 됐다. 퇴사에서 이직으로 부드럽게 디졸브 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장르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다.


퇴사를 결정하고도 나는 스릴러 장르에서 완전히 탈출하지 못했다. 이유가 불분명한 공포와 긴장에 밤마다 무수한 꿈을 꾸고 서늘한 아침을 맞았다. 마지막 출근 다음날, 비로소 단잠을 잤다. 9시가 넘을 때까지 깨지 않고 잔 것은 몇 개월 만이었다. 창밖에 해가 밝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으면서 느낀 안락함에 감사했다. 직장생활 자체가 판타지 성장소설일 수 없다는 걸 몇 번의 퇴사 후에야 깨닫는다. 그러니 나는 애초부터 산장에 갇히는 스릴러 장르로 내몰리기 쉬운 인물 것이다.



결혼 답례품 준비해? 퇴사하는 사람이 조용히 나와야지. 나 참.
그래도 친구들한테 고마움의 표시는 해야지.


마지막 출근을 앞둔 주말 동생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짧은 엽서를 쓰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다 보니 종이백 하나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나는 앤딩이 중요한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직 실감 나지 않는 퇴사는 준비할 일이 많았다. '직장인'으로 퇴사하는 건 처음이라 직접 챙길 서류 작업이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퇴직금 챙기기. 작고 귀여운 내 퇴직금. 자칫 작다고 깜빡 잃어버릴 수 있으니 가족들에게 퇴사 빔 한 벌씩 해주고 통장에 잘 넣어두기로 했다. 사실은 아직 퇴직금을 받지도 않았는데 벌써 돈을 써버렸다. 본편에서 성급한 캐릭터는 코멘터리에서도 한결같다. (나는 아무래도 고전적 캐릭터 인가 보지?)


퇴사를 주변에 알리는 것도 중요한 할 일 중 하나다. 누구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이것은 퇴사해본 사람만 아는 고민일 것이다. 퇴사를 전해야 할 사람의 수만큼 표현 방식도 다양했다. 건조한 정보만 주고받거나 감상적인 회고를 늘어놓거나 B컷 공개처럼 은밀하거나 비방용 필름처럼 적나라했다. 주인물들의 대사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축하해”, “부러워".


이번 스토리의 반전은 퇴사 결정 이후에 있었다. 밀실에 갇히기 쉬운 등장인물은 뒤통수를 맞기도 쉬운 사람이란 건 뻔한 설정인데, 또 나만 몰랐다.



이참에 고백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따로 있다. 내 책장의 골든 플레이스는 늘 그들이 차지한다. 뉴베리 메달 수상작들, 그리고 폴 오스터. 청소년 성장소설을 꾸준히 모으기 시작한 지 10년쯤 되었다. 특히 30-60년 대 미국 빈민층 배경 소설이 많은데, 그건 뉴베리 메달 수상작의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처럼 한 두권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맞아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시작했고 어느 순 곁에 두고 싶은 세계가 되어 꾸준히 모으고 있다.


폴 오스터를 처음 만난 건 대학생 때였다. 폴 오스터가 좀 읽는다 하는 대학생들 손에 끌려다니며 인기를 누린 지도 몇 년 지난 후였다. 하지만 좋은 작품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법. 리얼리티와 판타지 사이의 쫄깃한 줄타기에 매혹당한 후, 믿고 읽는 작가가 되어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 내렸다. 나는 완벽한 판타지나 홍상수 풍의 리얼리티엔 매혹되지 않는다.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 폴 오스터가 정확히 내 취향이다. 그리고 서툰 사람들의 성장기가 좋다.



이번 퇴사도 결국 판타지와 리얼리티가  적절히 배합된 성장소설로 완성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담아 엔딩에 특별히 공들였다. 아직 얼떨떨한 기분이지만 잘 마무리했길. 고마웠던 모두들. 해피엔딩 맞이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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