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면, 특히 장대비가 쏟아진다면 사건이 벌어지기 좋은 조건이다. 감정이 물을 먹고 가장 무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좋은 일은 드무니까 비가 온다면 불행을 만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엄청난 빗줄기가 끌어올리는 흙, 풀, 나무 냄새는 불행이 덤벼들기 쉬운 비 오는 날에 기대할 수 있는 최대 행운이다. 4년 전 사려니숲길을 비와 함께 걸었다. 물 먹은 신발이 가장 먼저 질꺽 질꺽 울었다.
와! 피톤치드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젖은 채로 걷는 것은 피곤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이건 우리의 첫 번째 여행이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걸어보자. 삼나무 숲도 보고 싶어. 흠뻑 젖은 채로 사진을 찍었다. 숲 안쪽에서는 비밀스러운 물안개가 피어나고 숲 향기가 절정에 이른 10월이었다. 비 오는 숲길은 그 여행의 가장 좋은 기억이었다. 비 때문에 피톤치드 때문에 숲 향기 때문에 구멍 난 양말 때문에 이상하게 찍힌 사진 때문에 욱신거리는 다리 때문에 즐거웠다. 즐거울 이유를 무엇이든 찾아낼 수 있는 날이었다. 숲에 처음 가본 이방인처럼 모든 것이 흥미롭고 즐거웠다. 4시간 동안 젖은 숲길을 다니느라 못쓰게 된 신발을 버리고 우리는 같은 디자인의 신발을 샀다. 어릴 땐 옷, 신발, 가방, 인형, 학용품도 같은 게 많았는데. 같은 물건을 사는 게 얼마만이야.
오후를 다 보내고 해 질 녘 항구가 보이는 숙소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 몸의 관절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려고 바둥거리는 것 같다. 이제 막 태어난 기린이 네 다리로 서보겠다고 휘청거리는 모양으로 엉거주춤 침대로 기어가 바삭거리는 이불에 안기니까 또 행복하다.
그래도 비 오는 날 꼭 숲길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진짜 재밌었다. 그치?
젖은 종이가 달라붙듯 비에 젖은 기억은 마음에 착 감겨 더 오래가는 것 같다. 잔향도 깊게 감긴다. 비 오는 날에 대해서는 나쁜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없을 리가 없는데. 삭제한 것인지 애초에 아무런 나쁜 기억을 입히지 않은 것인지. 배수구로 빗물 빠지듯이 흘러가 버렸는지.
태풍이 스쳐간다고 비가 요란하게 내린 날. 빗소리에 안겨 걸으니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날씨다.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머릿속에 비 내리듯 규칙적인 소리가 들린다. 솨아-솨아-소리를 따라 생각이 내린다. 거르지 않은 생각이 내린다. 맨홀 구멍에 빠지는 빗줄기처럼 대부분 사라지고 어떤 것들은 고여서 깊이를 만들고.
비가 오면 쓸려간 것들의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상쾌함 때문에 좋은 건 지도 모른다. 정리벽이 있는 사람이 비를 좋아하는 건 어딘가 모르게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비가 오면 연락 오는 사람들이 있다.
네가 좋아하는 날씨다. 빨래 안 마르는 날.
혼자 사는 친구는 방안에 널어둔 빨래가 눅눅해진다고 걱정하면서 연락한다.
좋겠다. 비가 아주 주룩주룩 온다. 하루 종일 너만 신나겠네.
비 오는 날은 우울해서 싫다는 친구가 투덜대며 연락한다. 그러니 내가 비를 좋아한다. 이렇게 친구들이 오랜만에 소식을 전한다. 이번 여름은 비가 박하다. 지독한 더위가 끝을 모르고 태풍도 매번 비껴가는 통에 비 소식 들은 지 오래다. 독일 남부에서는 와인 출하시기가 빨라져 농민들이 좋아한다는데. 독일 농부들이 덜 좋아해도 상관없으니 비가 내리면 좋겠다. 우리 농가 밭의 농작물에게도 비가 간절하고 그만큼 나에게도 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마음도 촉촉하게 말랑하게 물을 먹을 것이고 오랜만에 친구들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지금은 너무 퍽퍽하다.
매일 고민이 한 짐일 것 같지만 책상에 앉는 순간부터 퇴근까지는 고민의 틈이 없다. 우선 퇴근 후로 미룬다. 퇴근하고 나면 너무 피곤하다. 지하철에서 내내 서있다 보면 종아리가 단단하게 부어오른 느낌이 든다. 좀 앉고 싶은데 대체 인천에서 종로까지 출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우리 다 같은 처지였나요? 집에서 저녁을 좀 해 먹을까 하다가 포기하길 몇 주째 반복했다. 냉장고에서 나를 기다리던 양배추, 부추를 곱게 보내줬다. 간단한 조리조차 피곤하니 우선 고민도 미룬다. 누워서 TV를 보다가 잠들었는지 엄마가 깨운다.
야, 빨리 일어나. 씻고 자.
고민을 해야 되는데, 우선 졸리다. 내일 고민해야지. 아침이 밝으면 출근 열차에서 고민을 해볼까 하지만 우선 오늘 읽을 성경을 몇 장 읽고, 머리가 깨어나도록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어제 헤어졌던 인천-종로 구간 출근 동지들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휘청이다 보면 다시 종로. 자 이제 드디어 고민을 할 수 있다. 고민해보자. 하고 아침산책을 한다. 30-40분 간의 짧은 산책 동안 산만하게 몰려드는 잡념을 줄 세우기만도 바쁘다.그와중에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결국 오늘도 고민 실패. 너무 퍽퍽하다. 비가 와야 할 텐데. 고민을 하려면 아무래도 비가 와야겠다. 그러니 비오는날 고민하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이대로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