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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n 12. 2019

먼지보다 가볍게 훌쩍

악몽을 꾸었다. 짧은 이야기 토막이 옴니버스처럼 이어지는 공포 영화 구조였다. 내가 곧 너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겠다고 협박하는 괴물에 쫓기는데 악질 괴물은 협박만 할 뿐 결정적인 순간을 미루면서 나를 몰아세웠다. 무섭고 괴롭지만 아직 최악은 아니니까 괜찮아 (혹은 빨리 최악이 와버리면 좋겠어) 하면서 버티다 잠이 깼다. 발이 시려서 깬 것 같다. 수면 양말이 잠결에 벗겨진 것이다. 발이 시리면 악몽을 자주 꾸는 것 같은데. 과학적인 근거가 있을지도 모른다. 6월이 시작되었는데 어제는 무척 싸늘했다. 올해는 더위가 늦게 오는 편이라더니. 일교차가 커서 간절기 옷을 안 사고 버티기가 고되다. 조금만 더 참아보자. 


더위가 늦게 오는 탓에 5월 즈음엔 다 지났어야 하는 환절기 비염을 6월 초입까지 겪고 있었다. 공기가 건조해지면 왜 ‘이비인후’가 한 번에 모여 과를 이루는지 이해하게 되는 현상을 겪는다. 귓속이 간지럽고 코와 눈과 목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는 몇 주를 보내야 한다. 날이 습해질 때까지.



단골 병원 선생님은 꽃가루 끝물이니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했다. 날씨 앱에서 꽃가루 지수를 확인하라며 친절히 앱을 켜서 확인시켜 주셨다. 그렇지만 꽃가루 지수를 알고 나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알려주지 않으셨다. 집먼지 진드기도 문제라고 하셨다.


요맘때는 날이 건조해서 공기 중에 각질이 많이 날아다녀요. 그걸 먹고사는 집 먼지 진드기들이 많아져서 비염환자들이 고생을 합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진드기들과 내 몸에서 탈락된 각질들이 얼마나 날아다니고 있기에 나는 매일 휴지를 코에 달고 살아야 하는 걸까. 훌쩍. 최근 읽은 책에 따르면 사람이 머리를 감지 않고 1년을 지내면 각질이 무려 3kg나 나온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이런 걸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하나보다. 아침에 침대 정리를 할 때면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서 이불을 펄럭거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물이나 차를 자주 마시는 기본적인 요법(?)은 정작 효과가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져서 일찍 일어나게 되는 효과만이 드라마틱하다. 코를 징하게 풀다 보니 얼마 전 다녀온 비 오는 부암동 숲길이 그립다.



눈에 보이는 먼지라도 정리해볼까 하고 쌓여있는 책 위를 들여다보니 먼지 입자들이 소복하다. 맙소사. 얼른 젖은 수건으로 닦아내고 이참에 또 한 번 정리하자 싶어 몇 권을 골라냈다. 이건 이번 주 내에 헌책방에 팔자. 이건, 빨리 읽고 팔자. 하고 쌓아보니 빨리 읽어치워야 할 책들이 나를 노려본다. 알았어. 알았다구. 곧 읽는다구. 


다 읽은 몇 권의 책을 들고 나와 헌책방에 넘겼다. 예상보다 매입 가격이 높아서 하루 용돈 번 기분이었지만 저녁에 동생이가 출출하다기에 옛다 하고 치킨을 시켜주었다. 사실 동생이 보다 더 신이 난 것은 엄마였다. 


엄마 맛있어? 
응. 안 그래도 뭔가 맛있는 게 먹고 싶었는데. 너무 맛있네.
치- (어머니, 오늘의 치킨은 책은 빌려서 보라던 어머니의 잔소리를 등지고 샀던 책들의 몸값이랍니다. 맛있게 드신다면 앞으로는 책 사는 거 잔소리 그만 하세욧. 저도 얼마 전에 어머니가 사준 코스요리 맛있게 잘 먹었어요.)


치킨으로 치환된 책을 추모하며 방 안의 먼지들을 더 털어내기 위해 침대 밑을 닦아냈다. 천천히 사악 훑어내자 회색 먼지가 딸려 나온다. 잡았다 요놈들. 재채기의 주범들. 비염의 천적들. 습도 유지에 실패한 것은 나니까 먼지들이 이렇게 쌓이고 날리고 집먼지 진드기가 살찌는 모든 현상에 대해 탓할 수 없다. 결국 또 반복하는 것은 잠들기 전, 잠이 깬 직후 물 한 컵을 꽉 채워 마시는 정도로 수분관리를 하는 것이다. 외부 습도 관리는 실패해도 내부 수분관리는 놓치지 않으리라. 



하루 날을 잡고 여름맞이 대 청소를 해야겠다. 여름의 습도가 저절로 찾아오기 전까지 봄의 먼지들을 쫒아버리고 책머리에, 운동화 상자 위에, 벽시계와 장식 인형의 옷깃에 숨은 먼지를 털어 내야지. 꺼내서 쓸고 닦은 후 또 한 바탕 버리고 제자리로 돌려보내야지. 


종종 내 몸의 이음새나 빈 공간마다 먼지가 끼어있는 것 같아서 이불 털 듯 탁탁 털어서 먼지들을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외부 습도 유지에 실패한 자가 물을 두 컵 마시는 것처럼 이음새 사이 먼지를 털어낼 수 없는 자는 대신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어디에서든 후련한 기분을 찾아내야 하니까. 어쨌든 나름의 적극적인 대응이다. 훌쩍.


그리고 다시 방콕으로 간다. 아직 여름의 습도가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여름의 나라로 들어가는 선제적 대응. 비염과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이음새의 먼지를 날려 버린 후 다시 제 자리로 돌려보내기 위해.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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