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확한 것이 좋은데 나는 애매한 상황을 더 자주 만났다.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답을 해주는 게 좋은데. 모호한 것들은 기다리게 해서 싫은데. 싫어하는 마음과 상관없이 자주 찾아오는 어느 시기엔 늘 기다려야 했다. 나는 그것을 ‘시간을 건너는 때’라고 부른다.
어느 쪽으로도 명확한 것이 없는 건너야 할 시간의 틈새에서 많은 시절을 보냈다. 어디에 명확히 소속되지 못한 존재로 영원히 틈새에 고여있을 것 같은 불안을 밀어내며 틈새 밖으로 나오기를 열망했다. 그림을 그릴 때 크레파스로 또렷한 선을 스케치하고 그 안에 색을 몰아넣듯, 또렷한 선 안에 스며들어가고 싶었다. 졸업과 취업 사이를 건너고, 퇴사와 이직 사이를 건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멈춰 있거나, 그 외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의 틈새를 때론 가뿐하고 버겁게 건너다보니 지금 여기에 와 버렸다.
시간을 건너는 것이 불안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잠시 열외가 되어서 지켜야 할 경계와 규율이 사라진 상태에서 오는 충만한 해방감도 있었다. 해방감의 필수 조건은 정한 기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여행처럼 정한 기한이 있고 목적지가 분명해야 불안 없이해방감에 취할 수 있었다.
안온하거나 혹은 불안한 틈새를 벗어나려면 두려움 위로 뛰어올라야 했다. 틈새에선 불안이 불행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불행이 너무 두려워서 배에 물이 샌다고 인정하느니 차라리 배와 함께 가라앉는 쪽을 택하는" 편이라 남들보다 더 많은 충동질이 필요했다. 두려워서 계속 고여있을 순 없으니 스스로 충동질하려고 나로부터 또 다른 나를 분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마치 타인처럼 두려움으로 뭉친 첫 번째 나를 기어이 틈 밖으로 끌어낼 두 번째 자아를 만들었다.
그래 이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남일이라고 생각해 봐. 별 것도 아니잖아?
여기 두 번째 내가 밀어 올리며 건너온 시간과 벗어난 틈새의 흔적을 가진 첫 번째 내가 있다. 가끔 잘 여물지 못한 자신을 또래들과 비교하며 부끄러워한다. 모든 낯선 것이 괴롭던 시간의 흔적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가끔은 잘 참고 이겨내서 기특했지. 충분히 노력하지 못한 시간은 후회되고, 불행이 두려워 이른 결정을 하지 못하고 가라앉고 있었던 시간도 빠짐 없이 흔적을 남겼다.
흔적을 짚어 가다 보면 가끔 ‘사이’라는 것이 특색 없는 시간처럼 느껴진다. 의미랄 것도 없고 우왕좌왕하는 것 같기만 하다. ‘열외’ 라 좋다가도 뭘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고 의미는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래도 그게 영 쓸데없었던 건 아닌데. 그 ‘사이’를 건너온 덕분에 많은 문제들을 익숙하게 덤덤히 받아낼 수도 있고 가끔 내가 뭐라고 누군가의 위로가 되기도 한다. 덕분에.
올해 여름도 몸에 시간을 새겼다. 여름마다 그렇듯 자주 입는 티셔츠 길이만큼 그을린 경계가 생겼다. 커피 수업에서 대인 상처는 두 달이 지났지만 흉터가 아물지 않는다. 수년 만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진 흔적은 종아리에 남았다. 동생이 여름이니까 한 번 해봐 하고 골라준 붙이는 손톱도 노랗게 반짝거린다. 처음 해보는 자전거 투어, 처음 해보는 커피 수업, 처음 해보는 고민들과 결정의 흔적이다. 언젠가 또 ‘덕분에’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줄 일들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름의 절정 8월과 완연한 가을이 되는 10월, 그 틈새에 고여있는 9월은 시간을 건너는 달이다. 발등 위엔 아직 여름이 남아있고 머리 위로는 가을이 스친다. 모든 것이 또렷해질 한 시절을 기다리며 나는 제대로 9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