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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Nov 08. 2019

자몽차 한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팔린 약은 아스피린이다. 지금도 매년 전 세계적으로 600억 알이 팔린다.  카프카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달래주는 건 아스피린밖에 없다.”라고 했다. 카프카 명성엔 아스피린 지분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피린은 120년 넘게 카프카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로해왔다. 아폴로 11호가 우주로 날아갈 때도 함께 했다. 우주에서도 위로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다른 많은 발명품처럼 아스피린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널리 퍼졌다. 전쟁 스트레스 때문이었고 1920-30년 대는 '아스피린 에이지(Aspirin age)'라 불릴 정도였다.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자극받는 뇌의 영역이 신체적 고통으로 자극받는 영역과 같아서 마음이 아플 때 아스피린을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도 한다. 전쟁 직후엔 아스피린이 필요했던 것이 분명하다.


전 세계 아스피린 생산량의 1/3이 미국에서 소비된다. 오늘 태어난 아기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매년 100알을 먹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에 1억 8,550 만정 팔리던 약이 2005년에는 4억 3,520만 정이 팔렸다. 전쟁은 100년 전에 끝났는데 아스피린은 점점 더 많이 팔린다. 전쟁보다 더한 스트레스가 있다고 생각해도 될까? 인생에서 벌어지는 아이러니와 모순의 쌈박질을 생각하면 그럴만하다.  사소하고 작은 것부터 사납고 성난 아이러니까지.



미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아스피린 인심이 박한 편은 아니다. 아스피린 먹을 땐 통 크게 한알씩 딱 삼키고 그러는 쪽이었는데, Maja는 반알을 쪼개 주었다. 그 반알을 주기 전 반나절 동안 나를 관찰하고 문진을 여러 번 했다. Maja는 스위스 간호사 출신으로 내 두통을 어느 정도 엄살로 여기면서 오전 내내 약 없이 버티기를 강권했다. 결국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고 버틴 끝에 그녀가 스위스에서부터 챙겨 온 아스피린 반알을 얻어냈다.


스위스에선 이런 일로 아스피린을 먹는 일이 거의 없지.


라면서 ‘엄살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마.’라는 눈빛으로 천천히 아스피린을 쪼갰다. 약은 웬만하면 먹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약이 없어도 이겨낼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잠든 사이 직접 짠 자몽주스 한잔을 머리맡에 두고 갔다. 카프카에게도 Maja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아스피린의 위로를 적게 누렸을지도 모른다.


Maja의 말이 맞다. 아스피린 없이 이겨낼 수 있는 건 많고 약 없이 해결해야 할 아이러니는 더 많다.  꼬박꼬박 구호단체에 기부는 하면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새치기를 할 수도 있다. 너무 싫은 상사 에게 더 공손한 YES맨이 될 수도 있다. 살을 뺀다고 하고 마라샹궈와 꿔바로우를 동시에 시켜먹는 아이러니도 있다. 아이러니는 오늘의 신문 속에도 있다. “한 끼만 탁발해서 먹는 태국 승려들, 비만에 시달려 교계 비상”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태국 승려의 45%가 비만, 6.5%는 당뇨. 심장병과 콜레스테롤 비율 높음. 승려들이 낮부터는 물만 마셔야 하는데 최근에 설탕 탄 물도 허용된 것이 원인 중 하나. 승려 중 44%는 흡연자. 하루 한 끼 먹어도 야무지게 맛있게. 물엔 설탕. 살은 찌는데 체면 때문에 드러내 놓고 운동을 할 순 없음. 눈총 맞으면 아프니까.


설탕물 마시는 스님은 귀엽고 한 끼 최선을 다해 맛있는 걸로 채워 먹는 건 이해가 되고 운동할 수 없는 건 짠하다. 비슷한 아이러니를 본 적이 있다. 수년 전 24시간 기아체험 활동에서 의료팀으로 참여한 적이 있는데, 제일 잘 나가는 건 소화제였다. 굶는 체험인데 소화제만 죽어라 나간다. 배고픈 게 무서운 마음 이해가 되고 귀엽고 그렇다.



더 묵직한 아이러니도 있다.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넓은 면적을 차지해도 되나?' 싶어 사는 게 쑥스러우면서도 나를 너무 몰라주는 게 아닌가 섭섭하고 화가 나는 모순이 있다. 어젯밤 기도할 좋은 사람이 있겠다고 자신했는데 오늘은 불쑥 솟는 화를 참지 못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같은 상황도 수시로 온다. 부당하지만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모순도 수없다.


불행이든 기적이든 비상식이든, 고저가 평균치를 벗어나면 특별한 도움을 찾게 된다. 이해의 폭을 아무리 넓게 가져도  수 없는 아이러니를 풀어줄 처방을 찾게 된다. 알약처럼 1회 적정량이 규정된 실체적 처방이 있다면 좋겠지만 손에 잡히는 알약이 없으니까 Maja가 그랬듯 약 없이 비벼볼 일이다. 성급하게  한알씩 집어먹는 아스피린 대신 자몽차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시간과 겨루기를 해볼 일이다. 며칠 친구가 꿈 이야기를 해줬다.


둥둥 아, 꿈에서 너랑 소풍을 간 거야. 차 마시고 산책을 하다가 너무 예쁜 꽃밭이 나오는 거야. 근데 네가 너무 좋아하면서 막 꽃 사이를 뛰어다니더라. 네 얼굴이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어. 나 꿈 잘 안 꾸는데 말이야. 이 얘기해주려고 전화했어. 너한테 좋은 일이 생기려나 봐.


짠, 오늘의 자몽차가 배달되었다.  어제는 잠이 안 오는 통에 동틀 무렵까지 깨어 있었는데 오늘은 자몽차 덕에 으쌰 으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페달을 굴려 오늘 가야 할 만큼의 거리를 지체 없이  달려볼 수 있겠다. 차피 아무리 해결해도 인생의 아이러니는 생산라인을 멈추지 않을테니 나도 멈추지 않고 다급하게도 느긋하게도 말고 딱 오늘 만큼의 발을 구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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