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감정을 쓰다듬으면 전이가 되는지 다른 감정도 모두 엮여 무르게 된다. 껍질 벗은 소라게처럼 바위 사이로 완전히 숨어들고 싶어 진다. 어젯밤에는 미움에 대해 생각했는데 자고 나니 모든 마음이 집 잃은 소라게가 되었다. 미움, 미안함, 열등감, 시기, 우울, 냉소, 긍정, 분노, 체념, 이해, 희망까지 허물을 벗었다. 힘내 보자고 시작한 일인데 되려 나를 주저앉혀버린다. 결국 애초에 예상한 대로 나는 가장 못난 사람이 되고 만다. 예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고 만다.
그땐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는데 이런 방식으로 나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써왔다. 희열과 환희 때문에 쓰지 않았다. 다만 쓰지 않으면 불안했다. 뭐라도 어디에라도 써서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썼다. 많은 경우엔 하얀 화면을 펼쳐놓고 키보드에 손을 올려놓기만 하고 아무것도 쓰질 못하는데 그때 들려오는 노래 가사라도 두드리면 마음이 진정되곤 한다. 도닥도닥 퍼지는 마찰음이 좋다. 손끝에서 마음이 흘러나와 화면에 새겨지는 것 같다. 소용돌이치는 생각을 정리할 방법을 모를 때도 우선 쏟아냈다. 쓰고 싶은 마음이 정리하는 머리보다 앞서는 걸 막고 싶지 않았다.
잘 쓰고 싶은 날엔 괴롭다. 내 언어 세계가 좁아서 답답하고 마치 안경을 벗고 뿌연 세상을 허우적거리며 걷는 것 같았다. 로버트 드니로는 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마음은 진정 무서운 것입니다. 고독하고 신경질적이고 카페인에 중독돼있고 자신감 없고 자괴감에 빠져 있어서 컴퓨터를 마주하기도 겁이 납니다. 기분 좋은 날에 말이죠.
작가만 예민한 것이 아니다. 독자도 못지않을 때가 있다. 아직도 나를 다루는 게 미숙해서 어쩔 수 없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최대치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순간, 쓰는데 마저 실패하면 읽는 것이 위안이다. 작가는 사람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을 선명하게 대언해주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책을 펼쳤다. 달과 6펜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낮은 소리로 말하던 시간, 금테 안경을 읽고, 박사가 사랑한 수식, 신탁의 밤, 더 로드와 종이 시계, 울분, 대성당, 바깥은 여름을 읽으면서 감정을 선명하게 규명했고 따뜻한 우유 같은 위안이 스미는 것에 감사했다. 문장 사이에 누워서 가만히 문장의 온기를 받아들이고 싶어서 천천히, 속도를 늦추어 읽었다. 그들이 두려움과 자괴감과 중독으로 써낸 글을 먹고 마음을 채웠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고 노래 한곡을 일주일간 닳도록 듣는 것도 성격 탓인데 어떤 경우엔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이야기의 세계를 짚어가는 건 감정 소모가 많은 일이라 어떤 날은 그 세계를 통과하기가 버겁다. 최근에는 영화 《동주》를 어렵게 일주일 만에 끝까지 볼 수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며칠을 생각하고 용기를 낸 후에야 책을 펼치고 결국 몇 장을 못 읽고 침대맡에 내려놓기도 한다.
누구나 나에게만 말을 걸어오는 작가가 있기 마련이다. 유행처럼 지나가는 작가든 이미 오래전에 명성을 얻은 작가든 내가 그 작품을 만나야 그 작가는 현재 시점으로 살아난다. 그때는 작가의 언어를 통해 나에게만 열리는 세계를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세계를 자꾸 펼칠 수밖에. 지난주부터 《더 로드》를 다시 읽고 있다. 역시 오래 마음을 다잡은 후에야 첫 장을 열었는데 아마 《동주》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글이 위로할 수 있을까. 내가 쓰는 무엇이. 쓰는 동안 무언가를 마음에서 부연 감정을 쓸어낸 것처럼 누군가의 가슴에서 젖은 먼지를 쓸어내고 따뜻한 우유 한잔을 내밀 수 있을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큰 기쁨으로 여길 것이라고 기도했다.
폴 오스터의 말이 생각난다.
저는 항상 스스로에게 되돌아가는 책에 이끌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저를 책의 세계로 이끌어간 책에 이끌렸습니다. 비록 그 책이 저를 세상으로 데려가긴 했지만요. 말하자면 원고 자체가 주인공인 셈이지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문장도 떠오른다.
장모님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잖아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