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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l 02. 2020

언어를 잃은 경우

엄마의 언어는 음식이다. 후루룩 뚝딱 만들어내는데도 참 맛이 좋다. 엄마에게 30분은 근사한 요리를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손이 그렇게 빠른 것이 요리 똥 손으로써는 놀랍다. 냉장고에 테트리스처럼 꼭꼭 끼워 맞춘 음식들은 주체 못 할 애정표현이라고, 엄마는 주장한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아귀힘이 센 편이라 요리할 때도 넘치는 힘과 급한 마음의 콜라보로 자주 다친다는 것이다. 어릴 때 주방에서 엄마의 빨간 손을 본 것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요리와 피는 어울려선 안 되는 조합이다. 너무 오래오래오래 잊히질 않는다.

 

오늘 서점에서 두 권의 책을 두고 고민하다 한 권은 밀봉이 되어있어서 내용을 모르겠고, 한 권은 슬쩍 읽어보니 그래 이 책이야 하는 느낌이 들어 사 왔다. ‘그렇게 중년이 된다.’는 제목은 뻔하지만 내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란 확신이 들었다. 작가 이름이 무레 요코인 것과 별개로 제목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사노 요코가 떠올랐다. 마흔이면 중년인가, 인생 팔십이면 중년이지. 60대 중반인 엄마는 아직 노년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어떻게 규정되느냐가 중요한 모양이다. 아무튼 이 책을 샀다고 말했을 때 두 명의 친구가 푸하하 웃었다. 왜지.



얼마 전 미용실에서 새치 염색을 했다. 흰머리 많을 나이지만 유전적으로 외가는 흰머리가 풍성하다. 머리숱도 같이 풍성하니까 하나를 취하고 하나를 버린 것이다. 흰머리 지분이 더 많아지면 염색은 관두고 고잉 그레이 할 참이다. 엄마는 지금도 염색 안 하는 자신을 견디지 못한다. 남들은 딸내미들이 염색도 해준다는데, 하는 말을 계속 흘려듣고 있다.


엄마도 고잉 그레이 하라고. 머리숱도 많아서 멋있을 텐데.


엄마가 제발 내 변명을 진정성 있게 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니 올해 생일선물로 영양제를 두 개나 받았다. 중년인가 보다.


네이버가

1.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또는 그 나이의 사람.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라고 알려준다. 맞네. 맞아.


엊그제 통화한 친구랑 정확히 ‘스스로 돌볼 수 있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마무리 없이 통화를 마쳤다. 비슷하게 고민하다가 비슷하지 않은 선택을 하다가 결국 비슷한 고민으로 모여드는 흐름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마지막 손님으로 네 명의 여자가 왔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들과 취준생이 섞여 있다는 걸 곧 알 수 있었다. 코로나 시대의 취준생은 안타깝다. 면접이 취소되거나 채용 일정이 중간에 연기되고 사라지기도 한다. 불안과 조급함이 어찌 크지 않을까. 그녀들도 지금의 과업을 잘 해낸 후에 당당한, 혹은 덤덤한 첫걸음을 어서 떼고 싶은 마음을 와르르 쏟아냈다. 차진 욕도 간간이 섞여 있어 간절한 마음이 더 잘 보였다. 그중 이제 막 신입사원이 된 여자가 말했다.


나 면접 PT 때 준비도 연습도 엄청 많이 했거든. 근데 면접관 앞에서 너무 떨리는 거야. 말도 막 버벅거리고. 그래서 면접 마치고 나오면서 생각했지. 아, 내가 지금 되게 잘하고 싶구나. 잘하고 싶어서 실수하는 거구나. 괜찮아.


나의 감정과 행동의 의미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작업실에서 나도 같이 깨달았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다.


얘들아, 우리 다 잘 해낼 거야. 지금 잠깐 힘들지만 우리 늘 잘 이겨냈잖아. 괜찮아.


지금 그녀는 20대의 나보다 월등히 힘 좋은 청년이다. 많아야 20대 중후반일 젊은이들 힘내라고 쿠키 서비스를 내주었다. 서로 밀려나지 않게 잡아끌면서 영차영차 밀고 가는 청춘들의 고군분투를 지지한다. 진심으로. 우리의 불안은 대부분 ‘기회’ 때문 아닐까. 실패할 기회가 없다는 불안. 가난한 청년들의 비극은 실패할 자유가 없다는 데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난한 청년뿐 아니라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실패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겠지.



홍콩 시위대에서 누군가 말했다. 희망이 보이기 때문에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야 희망을 볼 수 있다. 그 말도 정신이 들게 했다. 그 신입사원도, 홍콩 시위대도 자신만의 언어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만의 언어를 가진다는 건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하다.


30년 가까이 된 친구의 언어는 유머인데, 이건 모든 언어 중 가장 매력적이다.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에 적당한 거리감을 두기 때문에 ‘사건’을 ‘에피소드’로 웃어넘기게 하는 언어. 그 친구를 알고 지내는 모든 시간 동안 부러워했던 그녀의 언어다.


오늘도 엄마는 밤 11시에 소고기를 굽고 있다. 사랑이 넘친다. 좀 많이. 가게에 정신을 쏟느라 책을 읽지 못한 지게 오래됐는데 이제 일이 좀 익숙해져서 가끔 교대근무도 하고, 그래서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서점엘 간다. 오늘은 중고서점에 가서 한 시간이나 어슬렁거렸지만 빈손으로 나왔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책을 색깔별로 정리해둔 것이 특이했다. 색깔별 정리의 원칙은 언제나 무지개. 파란색 보라색 칸 책들은 제목이 거의 읽히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몇 개월 전에 내가 판 책도 발견했다. 아직 아무도 사지 않았네. 이 책.



요즘은 무슨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서, 혹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남의 말을 빌려 나의 언어를 찾고 있다. 에세이를 읽는 이유다. 지난 휴일에는 김금희 작가님의 산문집을 샀다. 작가님을 만나는 첫 에세이다. 읽고 싶은 도이 있고, 쓰고 싶게 만드는 글이 있는데 이번엔 앞쪽이다. 내가 읽어왔던 소설을 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때 오는 긴장이 있는데, 이번엔 안심이다. 작가님의 어떤 날을 통해 내가 말하지 못한 언어를 발견한 기분도 들었다.



오늘은 중고서점에서 빈손으로 나온 뒤 가까운 교보로 가서 또 한 권의 에세이를 샀다. 제목과 달리 유쾌한 쪽이지만 제목에 낚여서 들춰본 것은 맞다. H선배의 말처럼 글이 나의 무기가 되어준다는 건 오늘 같은 날일까. 나의 언어를 잃었을 때, 나를 대신해주는 누군가의 언어를 빠르게 찾아 무기 삼는 것.



집에 와보니 엄마가 이불을 바꿔놓았다. 밤엔 추워서 아직 겨울 이불이었는데. 이제 복숭아색 여름 이불이 왔다. 그리고 자두랑 체리를 수북하게 담아서 방으로 가져왔다. 이걸 다 먹으라구? 지금? 잠깐 생각하더니, 먹을 만큼만 집어.라고 한발 물러섰다.


물방울 맺힌 체리를 오물오물 먹고 셔츠에 손을 쓱 닦았다. 엄마, 고마워. 부침개를 해주고, 이불을 바꿔주고, 순두부찌개를 끓여주고, 자두와 체리를 가져다주고, 삶은 계란을 챙겨줘서 고마워. 모든 말이 다 고마워.


오늘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무레 요코와 김금희, 김소민 작가와 폴 존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늦게 잠이 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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