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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Sep 15. 2020

밤은 부드러워

자신의 몸과 사고를 지배하는 방법을 가장 잘 가르치는 스승이 바로 잠 못 이루는 밤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장 잘할 수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에 잠기는 외로운 시간을 정적 속에서 보내본 사람만이 따뜻한 시선과 사랑으로 사물을 가늠하고 영혼의 바탕을 보고 인간적인 모든 약점을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中 -



잠이 줄었다. 알람이 없어도 보통 7시 반 경에 눈을 뜨는데, 이때 애써 잠을 청해보느냐 일어나느냐 결정해야 한다. 쉬는 날은 더 자보려고 애쓰지만 출근하는 날엔 그대로 일어난다. 수면 패턴도 다성 수면으로 바뀌는 것 같다. 중간에 두어 번 씩 깨서 핸드폰 놀이를 하다 다시 잠든다. 잠이 줄었다는 건 팩트, 나이 탓이라는 것도 팩트, 침대가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팩트다. 몇 년 전 미니멀한 디자인에 홀려 야심 차게 무인양품에서 침대를 샀는데, 프레임만 사고 매트리스는 사지 말 걸 그랬다. 얼마 쓰지도 않았는데 몇 개월 만에 허리 부분이 쑥 꺼지더니 이후로 영 잠자리가 불편하다. 일정 시간 이상은 허리가 아파서 누워 있기가 힘들다. 다양한 침대 경험 덕에 웬만한 침대에는 제법 잘 적응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다양한 침대 경험은 대부분 아프리카 출장지에서 쌓았고, 다수는 제법 따뜻한 하드코어였다. 주로 시골 마을로 다니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다. 첫 번째  만났던 침대는 그중에서도 퍽 인상적이었다. 시멘트 벽뿐인 휑한 방 한가운데 갈색 흙물이 든 매트리스가 프레임에 누워있었다. 거동이 귀찮은 80대 노인처럼 프레임에 몸을 걸치고 계셨다. 슬쩍 누우면 삐걱 소리가 벽을 치고 울려서 과연 밤새 누워있어도 되나 송구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바닥에서 잘 순 없으니 베드 버그를 피하기 위해 챙겨간 얇은 이불을 깔고 조심히 누워 양손을 가슴에 모았다. 매트리스가 몸의 모양대로 꾸욱 눌린다. 눌려버린 매트리스가 내일 아침까지 영영 올라오지 않을까 봐 걱정돼서 잠이 오질 않았다. 뒤척이지도 못하고 천장만 보고 누워있으니 매트리스 걱정은 곧 사라지고 밤의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다. 별빛은 소리가 나는 것처럼 또렷하게,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반짝이고 바람은 대범한 모양새로 스친다. 잔잔하고도 우렁차게 퍼지는 풀벌레 소리, 동물의 발자국 소리가 짧은 시간 동안 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아프리카 작은 심장 부룬디 산골 마을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가끔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취객들의 고성, 속도를 올려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채우는 도시의 밤에 익숙해서 잊고 있었던 밤의 주인이 제 목소리를 내는 밤이었다. 그  목소리가 가장 큰 곳은 남수단 톤즈였다.



톤즈 숙소에서는 발전기가 도는 저녁 4시간 동안만 전기를 쓸 수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면 잠시 전구를 켜는데 그때 하는 일은 씻고, 빨래하고 핸드폰 켜는 것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을 오래 들고 있으려면 불빛에 홀려 달려드는 백만 마리 벌레 군단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벌레 군단을 참지 못한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웠다. 우기가 막 시작되는 밤, 장대비가 양철지붕 때리는 소리가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삽시간에 소리에 완전히 잠겨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엔 잠시 컴파운드 주위를 걷기도 했다. 선명한 반딧불이의 춤을 보고 돌아와 여전히 축제 중인 대자연의 소리에 묻혀 잠들었다. 나는 밤의 공간을 잠시 빌려 머무는 손님이었다. 손님답게 조심스럽게 약간의 공간을 차지하고 누워있는 동안 밤동안 오염된 낮의 생각들을 씻어내면서 톤즈에서 머문 일주일 동안 밤이 얼마나 넓은 사색의 공간인지 깨달았다.


현명한 사람들은 이렇게 먼 곳의 낯선 밤이 아니라도 밤의 의미를 깨닫겠지. 사람이 만드는 소리가 잦아들면 아프리카 시골마을이 아니라도 내가 장악할 없는 기운을 느끼게 되니까. 은근하게 감싸고 가려주고 중요한 것들만이 돋보이게 해주는 부드러운 밤. 그 안에서 혼자 있는 사람은 사색하고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춘다.



바람이 서늘해지는 가을밤, 풀 벌레 소리 때문에 문득 톤즈의 밤이 생각난다. 요즘은 그때보다 잠드는 시간이 빨라져서 밤을 길게 쓰지 못하지만 밤이 사색하기 좋은 때라는 건 잊지 않고 있다. 요즘은 밤 한가운데 있으면 쓸데없는 상상이나 불필요한 걱정, 좋지 않은 생각이 가장 빨리 온다. 그다음엔 조금 쓸모 있는 생각들이 뒤를 잇는다. 낮에 했던 행동을 후회하거나 미운 사람을 더 미워하기도 한다. 가끔은 오래전 서운했던 일들이 찾아오고 오지 않을지도 모를 미래에 먼저 가 본다. 경계 없이 아무 생각이나 하다가 또 혹시 예기치 않은 행운처럼 기분 좋은 일들도 상상하다 '에라이-'하고 깨몽 한다.


주로 영양가 없는 생각인 듯 하지만 오래오래 생각하다 보면 잔불에 오래 끓인 설탕물의 결정처럼 반짝이는 생각이 남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밤에도 생각을 펼친다.


<이미지 출처: 영화 'the tale of the ni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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