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죽고 못사는 인간이면 어때서
지인들에게 온갖 수식어를 붙여가며 백번도 더 설명한 나의 운명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적어보려니 괜시리 긴장이 된다.
내가 하는, 혹은 했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행위는 어딘가 간지럽고 부끄러워 나는 항상 완전하게 솔직하지 못했다. 나에게 사랑은 그 무엇보다 큰 동력이자 원천이자 어쩌면 내 전부였음에도 내 낯간지러운 날것의 감정들을 그대로 털어놓는 것이 부끄러워 나는 가짜 솔직함 뒤에 숨곤했다.
하지만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별 것 아닌 일도 그에게 말해줘야지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 된다. 설사 재미있지 않다한들 어떠한가. 별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시시콜콜 풀어놓는다며 그에게 장난끼 어린 핀잔을 듣고 또 그 상황에 함께 깔깔대며 웃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감사함에 익숙한 사람이다. 작은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소박함에서 행복을 느끼지만 커다란 꿈을 꿀 줄 아는 사람이다.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단 한번도 제대로 대답한 적 없었지만 나는 이런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소란한 음악이 울려퍼지던 어느 여름날 운명처럼 만나 우리만의 속도로 빠르게 또 천천히 가까워졌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부터 읽어야지 다짐만 하고 읽지 못했던 이민진의 파친코가 결국 2022년 봄 애플 오리지널 시리즈로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구하기 힘든 책이 되어버렸다. 당시 도서관이며 서점에서 모두 예약 대기를 걸어야 겨우 구할 수 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1권을 구했으나 2권을 구하는 것이 또 하늘의 별따기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땅에서 고통 받던 조상들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봤어도 일본 땅으로 건너간 동포들의 이야기는 잘 알지 못했기에 그 안쓰럽고도 흥미로운 서사에 나는 깊이 녹아들었고, 그 시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무렵 회사 근처 종로 도서관에 2권이 반납되었다는 알림이 울렸다.
만난지 4일된, 그다지 좋아하지도 편하지도 않던 그와 도서관에 동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까닭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같이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차려입고 만나 이야기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상의 한 부분을 노출하고 그가 그 안에 얼마나 잘 어우러지는 지 보는 방법이 더 빠를 것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가는 길이 심심해서였을지도, 혹은 그저 외로웠을지도.
나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와준 그 사람과 경복궁을 지나, 서촌을 지나, 종로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지 우리는 수줍게 이야기하고, 길을 잘못 들어 지도를 확인하고, 그러다 손을 잡고 걸었다. 책을 빌리고 책들을 구경했다. 나와서 서촌을 걸으며 어느 집이 커피가 맛있고 어느 집이 안주가 맛있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날씨가 좋으니 치킨에 맥주를 마시고 싶다는 말을 동시에 했고 마침 기름냄새가 나는 허름한 옛날통닭집을 발견해 잔을 부딪히고 치킨을 나눠먹었다.
내가 해본 중 가장 완벽한 데이트였다. 사랑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었고 눈에 보일듯 선명했다. 입으로 내뱉지 않아도 완벽하게 같은 온도의 사랑이었다. 그렇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도, 그의 마음도.
그렇게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더이상 파친코의 시대에 살고있지도,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전주의 한 옷가게에서 네가 치던 기타의 선율이 아직도 내겐 선명하다. 그곳은 그냥 평범한 옷가게가 아니었다. 작은 구멍가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들어가는 순간 코를 찌르는 인센스의 칼칼한 향에서 전주의 복잡한 길거리가 아득하게 잊혀졌고, 어딘가 비밀을 간직한 듯한 오래된 옷가지와 물건들이 신비로움을 풍겼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지만 가게의 매출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을 것만 같은 분위기의 여사장님이 다소 차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는데, 그 냉소적인 말투가 묘하게 중독적이라 발걸음이 안쪽으로 더욱 끌렸다.
말을 쉽게 거는 네가 특유의 넉살을 떨며 사장님과 몇마디 대화를 주고 받자 사장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로 창고 깊숙한 곳에서 멋스러운 기타를 꺼내오셨다. 너는 항상 그렇듯 자연스럽게 음율을 맞춰보고 손을 풀었는데 그 몇마디 음표에 사장님은 벌써 놀라시며 공짜로 들을 수 없겠다고 병맥주 세 병을 가져오셨다. 볕이드는 가게 구석 카운터에 맥주와 함께 자리를 잡은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몇가지 묻고 답했고, 그러는 사이 너는 가게 분위기에 맞는 연주를 시작했다. 너는 늘 그랬다. 자기소개가 필요하지 않아. 연주 할때 너의 표정과 몸짓만으로 너와 네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소개는 충분하니까. 맥주 몇모금에 기분좋게 취한 우리는 순식간에 너의 연주에 푹 빠져들었고 손님 하나 없는 가게가 꽉차게 느껴졌다.
그 모든 상황이 마치 누가 짜놓기라도 한듯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서 그 시공간에 있는 내가 현실과 멀게 느껴졌다. 나를 이렇게도 자연스럽게 이렇게나 멀리 데려다 놓는 너를 내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겠어.
사람들은 사랑 얘기에 술렁인다. 사랑 얘기에 웃음짓고, 눈물을 흘린다. 환멸나는 비극의 사랑 얘기일지언정, 그래서 듣다가 머리 끝까지 분노에 찰 지언정 사랑 얘기가 궁금하다. 그 시작과 끝이 모두.
사랑한다는 감정, 그 정의와 그 경계, 괜찮은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 또는 그 반대의 과정 모두 개개인 마다 극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또한 모든 사람이 결국 공감하고 동하게 되는 감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안다. 사랑이 가진 힘이 얼마나 큰지.
옷깃에 스쳤던 병아리 눈물만큼의 사랑과 설레임이 이리저리 치이는 이 세상을 살아낼 힘을 준다. 사랑 때문에 우린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혹은 지구에 홀로 남겨지기도 한다.
사랑에 배신당했음에도 계속해서 사랑을 찾는다. 사랑이 없으면 외로우니까.
손잡을 사람이 없어서, 안을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게 아니야.
네가 나를 오랫동안 사랑하면 좋겠어. 평생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고 싶어.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하나봐.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늘 확인받고 싶어서.
이때까지 나의 일부는 언제나 아주 조금 외로웠다. 내가 하는 사랑의 모양과 꼭맞는 상대를 찾지 못해서 그 조그마한 빈틈에 한없이 외로워했다. 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줄 그대를 만나고 나는 지금 더할 나위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반짝이는 너를 만나 나는 비로소 완성된 것 같아. 완성된 우리가 함께 견디어갈 세상이 기대돼. 나를 기대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