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이여 안녕
배변훈련보다 더 긴 프로젝트가 있다면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낮잠 떼기'다. 낮잠이 벌써 사라질까봐 걱정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제발 좀 사라지라고 빌고 있다. 하원이 4~5시인데 그 이후에 잠들면 어떻게 되는가? 자정이 되도록 말똥말똥한 참사를 겪는 것이다.
고망이의 경우 가을쯤 낮잠을 버티는 빈도가 늘어 사라지려나 했더니 겨울이 되자 부활했다. 평소 날씨가 저기압일 때는 잠을 잘 깨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걸 생각해보면 낮이 짧아진 영향도 있을 것 같다.
어떤 엄마는 낮잠이 사라지길 기다리지 않고 쫓아냈다(?)고 한다. 졸려서 눈이 감기려 하면 음악을 크게 틀고 태블릿도 적극 보여주었으며 감기약을 먹고 있을 때라 졸린 성분이 있는 힝히스타민제의 용량을 살짝 높여 먹이기도 했단다.
낮잠을 대하는 모든 엄마의 자세가 같을 수가 없다. 잠들어버리면 깨우는 것이 안쓰러워 일어날 때까지 내버려두는 엄마도 있다. 그러면 심할 땐 자정쯤 일어나 저 혼자 놀다가 새벽에 잠드는 일이 생긴다고 했다. 내가 그럼 어떡하냐고 했더니 "글쎄요, 나는 잠들어버려서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서로 크게 터치를 하지 않는 모자지간이니 가능한 것이다.
나는 낮잠을 쫓아내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우리 고망이는 본인이 깨면 나를 꼭 깨우기 때문에;) 낮잠 15분 내로 컷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래도 11시를 넘겨 자기도 한다. 아니 낮잠을 건너뛰어도 11시까지 버티는 날이 있다. 11시 전에 자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몇 주를 보내다가 어느 날, 이대로 둘 순 없다고 각성하게 되었다.
충분한 수면이 기본이다!
그래, 모든 것의 밑바탕. 우리 까다로운 기질의 소유자이자 의사소통에 소극적인 세팅값을 가진, 컨디션이 많은 것을 좌우하는 우리 유아, 고망이의 요란한 잠투정과 대답할 의욕 없음, 친구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음을 극복하려면 일단 일정한 패턴으로 잘 재워야 한다. 이 엄마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으!
그래서 스케줄을 최대한 조정해 저녁 타임 일을 줄였다. 저녁식사-목욕하기-수면의식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진두지휘할 사람은 여전히 이 몸이기 때문이다. 할머니 못하신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꿀잠 영양제로 유명한 마그네슘 영양제를 매일같이 먹였다. 또 중요한 것, 낮잠 15분 컷을 지키고 오전 8시 전에 일어나도록 했다.
놀랍게도 바로 효과가 나타나,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낮잠을 버텨내고 8시 30분에 잠들어 다음날 8시까지 자는 쾌거를 거두었다. 8시 대가 뭐냐 10시 전에 잠든 기억도 희미한데. 맘카페 가면 7~8시에 재우라고, 그게 엄마의 의지 문제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글들을 보며 열받아 했는데. 이게 되네? 그리고 그 주는 늦어도 in 10시를 지켜냈다. 고망이의 컨디션도 당연히 쾌청.
하지만 변수 많은 육아, 유지가 쉽겠는가. 지난주는 낮잠을 1시간 넘게 자는 일이 생기고 오전에 너무 일찍 일어나는 일도 생겼다. 부족한 수면 후 눈 뜬 그날은 어린이집 친구들과 키카에서 만나 놀기로 약속돼 있었다. 피곤할 만도 한데 기분 좋게 출발한 고망이가 거기 가는 길에 차 안에서 잠들어 버렸다. 나는 하던 대로 15분 컷 해서 데리고 들어갔다. 이제는 익숙해져선지 짧게 자고 일어났다고 떼를 쓰지는 않아서였다.
그런데 입장해서 친구들과 같이 놀기는커녕 인사도 제대로 안 나누고 나만 불러대는 거다. 그러다 나랑 어른들이 친구한테 가보라고 몇 번 권했더니 불편한 얼굴로 그런다. "집에 갈래요."
예상 못한 일은 아니지만 부드럽게 달래봤다. "불편하면 같이 안 놀아도 돼. 딴 거 하고 놀자~" 그랬는데도 계속 간다고 야단이었다. 시끄럽게 구는데 붙들고 있을 수도 없고 해서 결국 먼저 집으로 왔다. 엄마들이 "고망이 아직 잠이 덜 깼어~" 하면서 이해한다는 말을 했지만 내 맘이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추측해보건데,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 안 좋은 컨디션을 만나 '아주' 불편한 기분을 만들고 그래서 그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던 것 같다. 그럴 수 있지 이해해. 하지만 이 비슷한 상황이 1년 반 전에도 있었던 게 마음을 헝클어지게 했다.
집에 와 오후 내내 용케 잠을 버텨내고 맞은 취침시간. 계속 속으로는 키카에서 도망치듯 나온 일이 목에 걸려 있었다. 친구들과 교류는 피하고 그 보상심리로 나한테만 더 매달려 노는 거 아닌가 싶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다 갑자기 고망이가 뭔가를 가져온다며 불을 켰는데,
"아악~!"
비명이 절로 나왔다. 맞은편 벽 한쪽 구석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내려온 것이 보이는 거다. 최근 둘 다 감기를 오래 달고 있어서 매일 밤 가습기를 세게 틀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곰팡이라니. 그 형체 자체도 무섭고 어떻게 지워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곰팡이가 피다니. 어떡하지? 아 무서워~" 곰팡이에서 터질 줄은 몰랐는데 거기서 터져 진짜 엉엉 울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재앙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별일 아닌 걸로 왜 그러냐는 이성의 말은 노이즈처럼 사라지고 암담함만이 가득 차 올랐다.
그때 불을 끄고 돌아온 고망이가 작은 팔로 나를 안으며 다독였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병 주고 약 주는 이 로맨티스트.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지금도 헛웃음이 난다.
"엄마 정말 무서웠어."
만 4세 아기에게 어리광이라니. 어쨌건 만 4세 아기에게 위로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곰팡이가 피었다. 곰팡이가 피었다."라고 그말이 재미있는지 여러 번 되풀이하는 고망이에게 그만하라고 정색하며 우리는 꼭 껴안고 좋은 꿈 꾸러 떠났다.
10 PM. 헝클어진 하루의 끝이 나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