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최근 정말 자기에게 크게 화가 났어. 우선은 그날 퇴근 후 후배가 '잠깐 보자'는 그 만남에 응해서, 곧장 오라는 나의 말에 알았다고 해놓고서는 아무 연락도 없이 거기에 가서. 그놈에 '잠깐 보자'는 제의는 거절하는 법이 없고 그러면서 번번이 나한테 늦을 거라고 연락하는 일도 잊어버려서.
노동 강도 큰 일이 끝나고 밀려오는 허기와 칠링 타임이 간절한 와중, 술도 좋아하는 자기에겐 너무 반가운 일이라고 이해도 하고 어차피 고망이 수면의식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는 애매하게 들어와 잠을 깨우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 혼자 즐기는 육퇴도 나름 소중하고. 그래서 이제는 그러려니 했지. 벌써 우리도 9년 차잖아?
하지만 이번 주에는 화가 폭발하더라고. 우리를 포함한 우리 집이 몽땅 사라져서 자기가 망연자실한 꼴을 봤으면, 크게 후회하고 우는 꼴을 봤으면 싶은 생각까지 들더라.(그런 동화를 써볼까.)
그러려니 했던 문제인데 왜 화가 폭발까지 했던 걸까. 이해했다기보다 참고 있었던 건가. 자기한테는 그렇게 말했지만 굳이 그 감정을 해부해본다면 더 근본적인 게 있긴 해. 며칠 동안 생각해봤는데 자기랑 교류가 충분치 않다는 느낌 때문일 것 같아.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시절을 괜히 떠올려본단다. 살아온 환경과 활약하던 필드가 너무 다른데 공통점이, 특히 취향은 더 잘 맞다고 신기해하던 그 아득한 시절이 생각나. 그리고 결혼 후 특히 고망이가 태어나고서는 더 강렬히 그것이 신기루였음을, 자기가 날 속인 부분도 많았음을 깨달았지. 그때는 서로에게 더 열의가 있어서 마음에 들려고 안간힘을 썼던 거지. 심해어처럼 지금 놓치면 평생 내 짝은 없다는 절박감 같은 것도 작용했던 것 같고.
지금은 가치관, 삶의 방식, 이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다른 사람과도 이렇게 잘 지낼 수 있구나 싶어 신기해하고 있어. 부모님을 때로는 이가 갈리게 싫어할 수도 있구나. 운전하다가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으면 창문을 내리고 당당히 욕을 싸줘도 괜찮구나. 종종 이를 안 닦고 자도 충치가 안 생기는구나. 저 정도로 갈리게 노력해야 인정받을 정도가 되는구나... 쉐임과 리스펙을 오가네. 너무 달라서 혀를 끌끌 찰 때도 있었지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와 내 지평을 확 넓혀주는 면도 있네.
가만 보면 우리 사이의 온도가 급랭 되는 순간이 각자의 우선순위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 같아. 우리가 서로에게 2위는 되었는데 이제는 좋게봐도 3위거든. 그러니 그것이 충돌하고 서로의 순위가 밀리는 데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서운함과 싸워야 돼. 그런데 그 서운함이 내가 더 큰 이유는 뭘까. 동생 말대로 내 사랑이 더 커서? 자기는 나 없는 인생은 폐인이라고 단정 짓지만 나는 자기 없는 인생이라도 그런대로 잘 살 것 같은데.
인간과의 교류로 얻는 충족감이 일정량 필요한데 상당 지분 자기한테 의존하고 있어서일까 싶기도 해. 육아로 다른 관계들은 다소 거리가 생겼잖아. 일단 다들 사는 공간도 방식도 달라져버렸지. 그나마 육아 동지들을 만나지만 그 관계가 깊을 수는 없고. 그러니 내 머릿속에 신경망까지 만들 정도로 깊이 의지하는 인물은 자기랑 고망이뿐인 거야. 자기는 늘 보고 자주 교류하는 동료들도 여럿이지만. (고망이가 요즘 다른 이들과의 소통에 신경망을 뻗는 대신 나한테 올인하고 그래서 그렇게 신경질적인 반응도 늘었던 거구나. 거울 효과로 이해가 좀 되네.)
퇴근 후 둘이 거실에 앉아있을 때도 동상이몽처럼 '노안이 오려는' 나는 TV 화면으로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지만, '난독증을 앓고 있는' 자기는 핸드폰을 놓지 못하지. 이따금 이것 좀 보라고 공동주시를 제안하지만 서로 관심 없어. 그러다 치킨이라도 도착하면 같이 넷플릭스나 보며 이야기를 나누지. 그러니 야식을 끊을 수가 없네. 나쁜 일을 은밀히 합심하여 공모한 사람들처럼 그때만큼 동료애가 진해지는 순간이 또 없어.(자기는 '건강 생활'을 잔소리하는 내가 그렇게 딴 길로 새는 행동을 즐기고)
그러고보니 먹는 게 그렇게 중요하네. 우리 스시 먹은 지도 좀 됐다. 우리가 가장 좋아해 마지않는 스시 타임을 즐기며 우리의 온도가 아직은 훈훈함을 느껴보자. 뜨거운 것보다는 이제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온기가 좋을 것 같아. 관여하고 신경 끄며 남은 세월 잘 지내보자. 뭐, 이 글을 읽을 리 없겠지만.
- 3월 폭설이 나리는 날에, K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