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u Mar 26. 2017

현실적 일탈에 대한 이야기

영화 [로마의 휴일] 리뷰

* 이 글은 영화 [로마의 휴일]을 이미 본 분들을 대상으로 쓰였습니다.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원치 않으시면 넘어가 주세요. :)


이번에 여름휴가로 9일 간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곳에서 마음껏 누리는 자유. 여행은 언제나 기분 좋은 설렘을 가져다준다.


반면 여행은 매번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현실로 소환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여행이 막 시작되었던 그때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난다.  


일탈이 이처럼 여운을 남기는 현실 귀환으로 종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난 결국 일탈은 '귀환'이라는 현실로 마무리될 것을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일탈'이라는 말에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다는 상황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은 오늘의 키워드, '일탈과 현실'을 경험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통제된 삶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하는 앤 공주와 실적을 위해 빅뉴스를 찾아 헤매는 일간지 기자 조 브래들리의 짧고 굵은 사랑 이야기.


워낙 유명한 고전이고, 그만큼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너무나도 많지만,

난 특히 다음 2가지 특징에 주목하고자 한다.


1. 일탈과 현실을 오가는 두 주인공의 상황에 대한 관객을 공감을 최대로 끌어내는 스토리 구성

2. 일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그 순간, 두 주인공의 마음을 명료히 전달하는 엔딩신 연출


그렇다, 한마디로 [로마의 휴일]은 두 주인공의 상황에 관객들이 폭 빠질 수밖에 없는 전달력과 흡입력이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를 가능케 한 작가 달튼 트럼보와 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추후 두 사람의 작품 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별도의 포스팅을 작성할 예정이다.)


자, 그럼 본 포스팅에서는 스토리 구성부터 먼저 파헤쳐 보겠다.


관객을 점점 끌어들이는 마성의 스토리 구성


영화 경험과 공부가 부족한 초짜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로마의 휴일]이 두 주인공의 감정 발전 과정을 기-승-전-결에 따라 매우 체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완성도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 기-승-전-결 각 파트 별로 들어가 볼까?


<기>


앤 공주와 조 브랜들리를 소개하는 인트로이다.

두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직업, 성격, 생활패턴, 그리고 만남이 있기까지의 상황을 친절히 설명해준다.


해외 순방을 도는 공주는 매번 반복되는 절제된 삶에 지쳐가고, 결국 로마에서 숙소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다.


조 브래들리는 실적이 필요한 일간지 기자로, 보스의 압박을 받고 있어 어떻게 하면 실리를 찾을지 궁리 중이다.


이들은 로마의 한 광장에서 처음 만나게 된다.


사실 <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크게 없다. 정말 인트로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는 것 정도?


단, 두 주인공의 만남은 (최근 만들어지는 많은 로맨스 영화에서도 그렇듯이)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서로의 신분을 속인 다소 기이한 만남이라는 것으로 영화는 관객들을 스토리 안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승>


앤 공주와 조 브랜들리 사이가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스토리 전개 단계이다.


영화가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하면서 관객의 '공감'을 쌓아나가기 시작하는 부분이고, 유명한 [로마의 휴일]의 명장면들이 가득한 부분이기도 하다.


두 주인공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차근차근 비춰주는 이 단계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 사랑을 키워갈 때 그러하듯, 두 사람이 경험하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꿈같은 비주얼로 차근차근 전개된다. 결코 급하지 않은 스토리 진행은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느끼는 바를 영화 밖 관객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심리적, 물리적 여유를 준다. 마치 관객에게 실제 '휴일'을 선사하듯이.


그리고는 관객도 어느새 속수무책으로 두 사람이 만들어 가는 추억에 함께 빠져든다.


주목할 것은, 아직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해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설명해주는 장면은 (적어도 내가 봤을 땐)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앤 공주는 조 브래들리를 '친절하지만 낯선 친구' 정도로 대하고, 조 브래들리는 중간중간 어정쩡한 눈빛으로 '호감'에 대한 아주 조그만 실마리만 남길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왠지 익숙하다.


그렇다. 두 사람은 소위 '썸'을 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로마의 휴일]에서 두 남녀의 사랑 발전 단계는 꿈에 있을 법한 비주얼로 아름답게 그려지지만, 동시에 현실감이 넘친다. 알지 않는가. 실제 우리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은 '썸' 이후의 절정에 다가온다는 것을.   

 

<전>


자, 이제 앤 공주와 조 브래들리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단계이다.

동시에 두 사람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두 주인공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파티에서 앤 공주를 찾는 수색관들과 맞딱들인. 도망가다 곧 강에 몸을 던지게 되고, 도망쳐 나온 강가에서 두 사람은 키스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실 귀환. 앤 공주는 원래 일정을 소화하던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조도 이를 이해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앤 공주를 배웅하는 길.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동차 안에서 마지막 키스로 작별 인사를 한 뒤 앤 공주는 골목길로 사라진다. 앤이 사라진 골목을 멍하니 쳐다보던 조도 곧 자동차를 끌고 집으로 간다.


여기까지가 <전>의 내용이다.

엔딩 신을 제외하고, [로마의 휴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신이 포함되어 있다. 강가 신과 자동차 신. 두 사람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가슴 설레는 신들이랄까?


<전>은 <기-승>까지 찬찬히 쌓아오던 두 사람의 감정이 드디어 화끈하게 표출한다. 이전 파트에서 강약 조절의 완급이 있었기에, <전>에서는 두 사람의 감정이 배로 전해지면서, 배우들의 명연기와 감독의 과하지 않은 연출이 한데 어우러진다.


사람들에게 [로마의 휴일]의 사랑이 이쁘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데에는 <승>에서 묘사된 두 사람의 수많은 에피소드뿐 아니라 <전>에서 확인되는 두 사람 감정의 표현이 지극히 현실적인 수위에서 정열적이고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절제미랄까?)


<결>


앤 공주와 조 브래들리의 사랑이 결론지어지는 스토리의 마지막 단계이다.


숙소로 돌아간 앤 공주는 다음날 로마에서의 마지막 기자회견 일정을 소화하고, 조 브래들리는 현장 취재 기자로 기자회견에 참석한다.


앤 공주는 로마가 가장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답변을 끝으로 기자들과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다. 마침내 앤 공주가 조 브래들리와 마주한 순간, 그들은 눈빛으로 소통한다. 그리고는 지나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때 두 배우는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보여준다. 특히 그레고리 펙의 눈빛 연기는 빛을 발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앤 공주가 퇴장했을 때, 조 브래들리는 그녀가 사라진 그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지만, 그녀는 뒤돌아 나오지 않는다. 잠시 후, 조 브래들리도 걸음을 옮겨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로마의 휴일] 엔딩이 너무나도 좋다.


감독의 카메라 연출이 그 가장 큰 이유이고 (이는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예정이다), 그다음으로는 스토리가'현실적인'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마냥 동화 속 'happily ever after'이 아니어서 작품의 완성도가 한층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하룻밤의 꿈처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것처럼, 두 사람은 '일탈'에서 '현실'로 돌아간다.


놀라운 점은 둘 다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매우 성숙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 같았으면 아쉬움에 사무쳐 서로의 관계가 좀 더 지속될 수 있는 어떠한 방안을 찾으려고 난리였을 것 같은데.


그러나 영화적으로 매우 현명한 결말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상대방의 상황과 의지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두 주인공의 마음이 한층 더 도드라지게 보이고, 그러므로 [로마의 휴일]은 한층 더 애틋한 사랑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일탈에서 되돌아온 현실은 분명 과거와 동일한 현실이다. 앤 공주도, 조 브래들리도, 스페인 여행을 마친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 동일한 현실을 살아가는 방식은 일탈 전과 후가 명확히 다르다.


즉, 일탈을 통해 어떠한 형식이든 삶의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 일탈은 그저 그리워하고 아쉽게 바라볼 대상이 아니라, 나의 삶을 완성시키는데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한 즐거운 추억이고, 앞으로도 또 다른 일탈에 충분히 뛰어들 용기를 주는 고마운 대상이다.


이렇듯 현실과 일탈의 연결고리를 나는 앤 공주와 조 브래들리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로마의 휴일]처럼 나에게는 [스페인, 세비야의 휴일]이 있었던 것일 뿐.


다음에는 또 어디로 일탈하러 떠날지, 그로부터 내 자신이 얼만큼 더 성숙해질지 벌써부터 설레 온다.

[로마의 휴일], 나의 인생 영화임이 틀림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