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감기 기운으로 밤새 코가 막혔다. 단순히 코가 막혀 숨쉬기가 힘든 줄 알고 잠결에 뒤척였는데 갑자기 숨이 너무 막히면서 심각성을 느꼈다. 아, 공황장애가 온 것이다.
회사 다닐 때 생긴 공황장애는 퇴사 후에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종종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찾아온다. 아무리 옆나라 라도 타국에서, 그것도 혼자 있는데 어두운 밤에 공황장애가 찾아오니 너무 무서웠다. 비상약도 한국에 두고 왔는데 진짜 어쩌면 좋지.
할 수 있는 긴급 조치를 취해본다. 먼저 숨부터 제대로 쉴 수 있도록 침대에서 일어나 시원하고 탁 트인 곳으로 천천히 이동해 본다. 다행히 심하게 온 것은 아니라 차가운 공기와 물로 달래며 숨을 잘 쉴 수 있도록 안정을 취해 본다.
어느 정도 괜찮아지고 나니 내가 계속 여행을 하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티켓을 검색해 본다. 근데 어차피 하루 뒤에 출국이긴 한데 하루 일찍 가는 게 큰 의미가 있나 싶었다. 경험상 내 공황장애 패턴을 보면, 한번 겪은 후 며칠은 괜찮기 때문에 일단 일본에 좀 더 있어보기로 한다.
고비 상황을 넘기고 나니 다행히도 괜찮아졌다. 하지만 타국에서 혼자 공황장애를 겪은 것은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무섭고 어두운 밤이 지나가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침이 밝았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조식 맛집이라고 한다. 감기 기운 때문에 입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담아본다. 소문대로 음식은 하나하나 다 맛있었다. 그러나 아파서 제대로 먹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내일 공항을 가야 하기 때문에, 다시 오카사 시내로 이동하려 한다. 장마철이라 아침부터 비가 계속 내렸다.
‘장마철’ 하니까 생각난 인상 깊은 대화인데, 잔걱정이 많은 나는 출국 전 친한 선배한테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내일 일본 가는데 장마철이래요, 아 여행 가서 비 오는 거 싫은데. 일정을 잘못 잡았나 봐요.”
(내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인) 선배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예전에 인도 여행을 갔을 때, 타지마할이 공사 중이었어. 그래서 타지마할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 공사 중인 타지마할을 경험한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
마찬가지로 일본의 장마를 경험한 사람은 몇 퍼센트나 될까?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선배의 사고체계가 너무 부럽고, 본받고 싶다. 어쨌든 선배 덕에 나는 여행 중 내리는 비가 불편의 요소가 아닌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비 오는 아침 따뜻한 커피 한잔은 또 엄청난 낭만이지. 기차를 타기 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조용해 보이는 카페를 검색했다. 가고 싶은 카페를 발견했고 골목골목을 지나 위치한 덕에, 일본 특유의 골목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비가 와서 더욱 운치 있었다.
카페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일본 할아버지 한 분이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주변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연세가 워낙 많으셔서 그런지 자전거에 깔려 일어나지를 못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무거운 자전거를 스스로 치우시려 하는데 그게 너무 위험해 보였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지만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급한 마음에 “조또 마떼!!!!!!”를 외치며, 내 캐리어랑 우산을 던져버리고 할아버지께 달려가서 위에 있는 자전거를 치워드렸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께 ‘잠깐 기다려!’라고 반말한 게 아닌가 싶다. 근데 뭐 나는 일본어도 모르고, 그런 걸 따질 때도 아니었으니..)
이제 할아버지를 일으켜 드려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가 괜히 더 다치시는 건 아닌가, 그래도 남자인데 빗길에 내가 제대로 일으켜드릴 수 있을까, 나 외국인인데 모르는 사람을 터치해도 되나 그 짧은 찰나에 별생각이 다 들었다.
너무 다행히도 마침 트럭 한 대가 지나갔고 나는 급하게 불러 세워 현지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현지인분께 할아버지를 맡기고, 다시 카페로 이동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타국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혼자 괜히 뿌듯했다.
카페는 외관부터 온전히 내 취향이었다. 인스타 감성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사장님의 오랜 손길이 묻어나는 소품과 따뜻한 감성의 우드 인테리어, 현지인들이 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종이 신문을 읽고 있는 풍경, 그래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현지 분위기야.
이미 조식을 먹은 뒤라 배는 불렀지만, 드립커피와 함께 대표 메뉴로 보이는 버터 토스트를 주문한다. 친절하신 할아버지 사장님은 깔끔한 셔츠에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고, 영어 실력도 수준급이셨다. 일본인들은 (당연히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상대적으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나의 선입견을 깨뜨리신 분이셨다.
조금 기다리니 큼직하고 따뜻한 버터토스트 한 조각과 정성 들여 내린 드립 커피를 내어 주셨다. 엄청나게 특별한 맛은 아니었지만, 뭔가 되게 클래식한 맛이라고 해야 하나.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 그 자체의 조합은 나에게 알 수 없는 안정감과 행복을 주었다.
이곳에서 나는 꿈이 생겨버렸다.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이런 컨셉의 조용한 카페 하나 차려서 따뜻한 커피와 버터 토스트를 내어 주는 친절한 할머니 사장님이 되겠다는.
비 오는 날의 실내가 따뜻해서 그랬는지, 커피와 토스트가 따뜻한 음식이어서 그랬는지, 꿈이 생겨서 그랬는지, 사장님의 친절 덕분이었는지, 뭐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마음을 가득 충전한 채 카페를 나와 기차역으로 향한다.
교토를 떠나는 건 진심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교토는 또 올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기에 나중에 꼭 다시 올 것이라 다짐했다.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날은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