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만 살고 있는 나이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젊은이들이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는 노인들에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수를 하겠지만,
우리가 저지른 것과 똑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온 세계가 아니며,
그들은 젊은 날의 우리보다 더 현명할 수 있다.
그러니 젊은이들이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나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우리의 경험을 그들과 공유하자.
그리고 그들이 “그래도 도전할” 때
그들과 함께 나란히 걸어가자.
- 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page60 (글항아리)
파커 J. 파머(Parker J. Palmer)는 교육과 공동체, 리더십, 영성, 사회 변화와 같은 이슈에 헌신해 온 미국의 존경받는 교육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지성, 감성, 영성을 통합한 그의 교육철학은 가르침과 배움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전 세계를 무대로 워크숍, 포럼, 강연회를 열며 ‘교사들의 교사’로 불리는 그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용기와 쇄신 센터’의 설립자 겸 대표이기도 하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고 흔히들 말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을 해보지 않아 옛날 우리들과는 다르게 열심히 노력을 하지 않고 너무 요행을 바라며 꿈과 야망이 없다고’
그러나 계절이 바뀌면 입고 있는 옷도 달라져 있고, 피어나는 꽃의 종류도 달라지듯이, 시대가 바뀌면 젊음이 살아가는 방식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흙길을 걸으며 무거운 등짐에 땀을 흘리면서, 신발이 닳아야만 성실했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마음이 먼저 닳아가는 시대를 젊은이들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를 살아가는 그들이 고생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고생의 모양이 세월이 흘러 예전과 달라졌을 뿐이다. 예전에는 몸이 먼저 지쳤다면 지금은 마음이 먼저 지치고, 예전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두려움이었다면 지금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안이 되는 세상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젊은이들이 꿈과 야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기에는 너무 빨리 현실을 알아버렸고, 야망을 펼치기에는 비빌 언덕 자체가 없는 세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망설이고, 그래서 겉으로는 무심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세대의 차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나 열심히 하기와 적당히 하기가 아니다. 서로가 걸어온 시간과 관념의 풍경이 달라 생긴 이해의 간격일 것이다. 그 간격을 탓하기보다 서로의 시간과 관점을 조금만 더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른들은 젊음의 고단함을 알게 되고, 젊은이들은 세월이 왜 노력과 인내라는 말을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된다. 젊음은 미숙한 것이 아니라 아직 쓰이는 중인 현재진행형의 이야기이고, 나이 듦은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거의 끝까지 읽어낸 사람의 걱정스러운 안타까움의 표정이라는 것을.
우리 인간이 언제 근심과 두려움이 전무했던 시절이 존재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그 나이와 그 시대에 해당하는 치열한 삶을 살아오면서 걱정과 두려움이 늘 존재해 왔다.
성장과 발육이 가장 왕성하고 호기심이 많은 청소년기인 10대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 고등학교에서 대학 입시에 올인해야 하는 학업으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가장 치열하게 공부하는 시기가 아니었는가.
어떻게든 험난한 내신과 수능을 거쳐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고생 끝, 행복 시작’으로 알고 십 대를 마무리하였는데.....
이십 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의 고뇌와 슬픔에 대해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스무 살,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만 살고 있는 나이’라고 말했다.
서른 살을 맞이하는 청년을 막 벗어난 그들에게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그의 시 ‘삼십 세’에서 노래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내 나이가 얼마인지 잘 모르고 살고 있을 때 훌쩍 내 곁에 사십이 와있듯이 공자는 ‘나이 사십은 세상의 유혹이나 미혹됨에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이라 했다.
남들처럼 그렇게 보란 듯이 살고 싶은데, 이렇게 웅크리며 수줍게 살고 있는 오십이 다가오면 공자가 말한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다.
‘오십에 읽는 중용’을 쓴 최종혁 작가는 ‘오십이 되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이 완성될 줄 알았다. 오십 정도면 가만히 있어도 나라는 인간이 반듯하게 만들어질 줄 알았다’고 술회한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그동안 애써 세운 것은 놓기 싫고, 더 늙고 병들기 전에 다른 삶을 한번 살고 싶은 나이 육십은 회갑의 나이가 아니겠는가.
100세가 훌쩍 넘은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육십 대쯤 되니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았다. 나를 믿을 수 있는 나이였다’고 강조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70쯤 되면 뒤를 돌아보고 회상을 하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70을 일컬어 고희(古希)라고 하지 않는가. ‘오래된 희(喜)’라는 뜻으로, 70세가 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70을 일컫는 또 한 가지 호칭으로는 종심(從心)이 있다.
종심은 ‘마음이 희망하는 대로 따른다’는 뜻으로, ‘70세가 되면 인생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이나 희망하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시기가 왔다는 의미다. 조용히 자신만의 삶을 즐기며, 그동안 못해본 꿈을 이루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나이가 만만해 보이는가?
그렇다.
만만해 보이는 나이란 없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강은교 ‘사랑법’에서
Tuesday, March 24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