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절에 가고 싶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절. 그곳에 가고 싶다.

by James Kim

“선운사에 가신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드득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마음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송 창식 [노래/작사/작곡]에서


청도 ‘운문사(雲門寺)’는 거기 그대로 있었다. 산속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가파른 계단을 한 발 두 발 세면서 숨소리 나게 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평지이듯 그저 속세이듯 그렇게 있었다.

운문사는 흔히 큰 절에 있는 일주문이나 사천대왕문이 없다. 주차장에서 늙은 벚나무 가로수를 몇 걸음 곁에 두고 걸어 우측으로 대문을 들어서니 황망하게도 사찰 경내에 들어선다. 대문을 넘어서니 시선을 압도하는 소나무가 있다. 그냥 보면 소나무 군락처럼 보이나 한그루의 소나무다. 그 소나무는 ‘운문사 처진 소나무’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 나무가 크다는 기록이 있는데 수령은 500년으로 추정하고 매년 봄 비구니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 정성껏 뿌려준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법률로써 보호받는 국가지정 문화유산이다. 이 외에도 운문사는 13건의 국가보물을 보유 중이다.

운문사는 걷기에 순하고, 보기에 편하고, 느끼기에 고즈넉했다.


요즈음 우리나라 대부분 사찰들이 교회와 비슷해지는 경향이 있다. 예스러운 고즈넉함은 사라지고 여기저기를 중창하고 새로이 웅장하고 커다란 절집들을 지어 올린다.

앞산의 ㅇㅇ사 주지가 절 탑을 새로 세우고, 뒷산의 ㅁㅁ사 주지가 대웅전을 크게 중창하니 가운데 있는 주지 또한 석축을 쌓아 올려 절의 규모를 키운다.

주지 스님은 불도저와 포클레인이 절마당을 가로지르며 옛것을 부수고 새것을 만들며 소리 지를 때 만족한 미소를 짓지만 절을 찾은 객들은 심기가 불편하다.

반대로 객들이 편한 걸음을 걸으며 사찰의 오래되고, 고즈넉함에 평안을 느낄 때, 그 절의 주지는 심기가 불편하다.

절이나 교회가 크고 웅장하면 신도가 많이 모인다. 신도가 많아지면 절의 주지와 교회의 목사는 목에 힘이 들어간다. 목탁 소리가 커지고 설교가 길어진다. 행사가 많아지고 불전함과 헌금함이 커진다.


삼십여 년 전 우연히 전북 부안에 있는 유서 깊은 아담한 사찰을 찾을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초가을이었는데 돌계단을 차례로 올라서니 절 마당에 금잔디가 깔려있고, 고추잠자리가 잔디 마당 위를 날고 있었다. 대웅전 뒤로 능가산 울금바위가 내려다보고 낡고 색이 바랬지만 기품 있는 대웅전을 바라보며 절 마당 잔디밭에 앉아 한참을 부처님의 은덕과 평화를 느끼며 뿌듯한 시간을 가지고 내려왔다.

올여름 부안 채석강에 마음과 몸을 쉬러 숙소를 정하고 그때의 고즈넉한 평화와 행복감을 느껴보려고 그 사찰을 찾아서 이동하였다. 곧 나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던 것이었고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한 것처럼 황망함을 느꼈다.

돌계단 아래 소박한 공간에 있었던 자그마한 주차장은 찾을 수가 없었고, 입구도 절 마당도 모두가 낯설었다.

과연 그때 내가 찾았던 절이 이 절 인지 아닌지 모두가 생경하고 황당했다. 변하지 않은 건 절의 이름과 장소이며 능가산과 울금바위는 거기 그대로인데 절 한편에는 공사 차량이 가득하고 새로 깎은 대형 목재들은 파란색 방수포에 덮여있고 폐목재는 담벼락 밑에 무더기로 싸여있었다.

고개 돌려 걸음을 뒤로하고 다친 마음을 다스리며 절을 걸어 나왔다.

주지가 일을 일으켜 객이 마음을 다치고, 객이 행복해하면 주지가 심기를 다친다는 생각을 하며 공사판을 벗어나는 걸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그리 큰 실망만 할 것이 아닌 것이 전라남도의 전 먼 벽지의 사찰들 중 몇 곳은 아직도 객들이 찾아가 평안을 느낄만한 곳들이 꽤 있다.

여행과 철 따라 피는 꽃을 좋아하는 나는 청춘남녀들처럼 꽃피는 때에 사찰을 찾아간다.

삼월 매화가 필 때면 구례 화엄사를 찾아가 홍매화를 멀찍이서 한참이나 쳐다보고 온다. 왜 멀찍이 서서 바라보냐고? 사진 찍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가까이 서 있으면 촬영에 방해되니 비키라고 한 소리 듣기 십상이다.


사월 하얀 벚꽃이 지고 나면 충남 서산 상왕산 개심사와 바로 산 너머 문수사를 찾아 왕벚꽃(겹벚꽃)의 분홍빛에 취해 돌아온다.

하얀 벚꽃이 순수와 깨끗함이라면 겹벚꽃의 분홍색은 요염과 황홀함이다.

개심사는 비교적 서울과 가까운 충남 서산에 소재하지만 주지 스님이 객들의 행복을 한 번에 앗아가지는 않고 천천히 앗아가고 있다.


동백꽃은 시골 새색시 같은 꽃이다. 초록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색 배합은 왠지 촌스러운 새색시를 생각나게 한다. 동백꽃은 한 잎 한 잎 바람에 아롱지며 떨어지는 꽃이 아니다. 동백은 처절하게 목이 뚝 끊어져 한 덩이로 꽃의 생명과 아름다움을 버린다.

동백꽃으로 아름다운 사찰은 전북 고창의 ‘선운사’와 전남 강진의 ‘백련사’이다.

이쯤에서 최 영미 시인의 사랑과 이별을 나타낸 시(詩) ‘선운사에서’를 느껴보자.


“선운사에서”


- 최 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여름에 피는 꽃은 배롱나무를 빼먹을 수 없다. 배롱나무(목백일홍)가 많은 사찰은 여러 곳이 있으나 크기나 웅장함에 있어 강진 백련사 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배롱나무를 나는 좋아한다. 백련사 배롱나무 위 절 마당 귀퉁이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면 다산 정약용이 보았던 강진만과 오버랩되어 세월을 넘나 든다.


꽃은 아니지만 꽃보다 깊은 울림을 주는 전나무로 유명한 사찰은 오대산 월정사와 부안 내소사가 있다. 월정사와 내소사의 전나무 숲길을 걸으면 숲과 산책하는 이가 은밀히 소통한다. 소통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고 아픔을 공유하며 미래를 기약한다. 전나무는 생각이 깊고 이해력이 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나무는 늘 용서하고 모두를 포용한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날 전나무 숲길을 걸어 보아라. 큰 호흡과 벗은 발로 머리를 높이 들어 전나무의 머리끝까지 쳐다보아라. 나의 걱정과 나의 근심이 전나무를 넘지 못함을 분명코 느낄 것이다.


사찰로 가는 진입로는 거의 모든 절이 걷기에 아름답고 마음이 평안하다. 거의 모든 절의 입구 산책로가 그리하나 나는 해남 대흥사와 순천 선암사 그리고 인제의 백담사 가는 길을 특별히 좋아한다. 절로 향하는 길가로 계곡이 흐르고 새가 울며 다람쥐가 쪼르르 뛰어나와 객에게 수줍게 문안 인사하고 돌아서는 길, 그 길을 나는 사랑한다. 걷기에 숨차지 않으며,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절집으로 가는 길, 옛 선사가 걷던 길, 옛 아낙이 불공드리러 가던 길, 그 길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나는 절에 가는 길을 먼저 걷고 절집을 걷는다.

걷는 그 길에 그 절의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주저리주저리 담겨있다.


Friday, September 12th. 2025.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첫 문장의 강렬함